2009년 4월 30일 목요일

사학과 전쟁사학

전쟁사학은 일반 사학과 별 다를 바 없는 '사학[史學]의 한 부분'이다.

어느 한 고리를 찾아내고 그 고리와 연결된 다른 고리와 사슬을 찾아 하나의 사슬로 만드는 것,

그게 바로 사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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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6월 6일에 시행된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실 목표는,

1939년 도이칠란트의 폴란드 침공으로 발발한 2차대전의 종결을 한시라도 빨리 가져오기 위하여 시행된 것이다.

 

하지만 이 작전은 예상대로의 전개로 진행되지 못했고 결국 1944년 이내로 끝내겠다는 생각은 1945년 5월이나 되어서 전쟁이 끝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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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이 노르망디 상륙작전[이하 오버로드] 이후 작전계획이 예상되로 진행되었다면 어떨까?

-우리 대한민국의 독립은 더 빨라지고 우리 손으로 나라를 되찾지 못한 아쉬움은 덜했을 것이다.

 

만약 이 오버로드가 훨씬 늦춰졌다면 과연 어떨 것인가?

-우리 대한민국의 독립은 더 늦어질 것이다.

 

헐? 이 무슨 위험한 발언인고...?

 

1945년 8월에 광복군의 한반도 진입 계획이 예정되어 있었던 점을 감안하자면

'독립이 약 1개월만 늦춰졌다면 좋았겠다'

...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과연 409명으로, 두세개 중대병력으로 대한민국에 독립을 가져올 수 있겠는가?

 

이 409명은 미국 OSS에서 훈련받은 특수요원들이였고 일당백이라고 보자.

하지만 17:1로 이긴 사람이 전설이 되는 경우를 봐도 실제 일당백은 거의 불가능이다.

그렇지만 이렇다고 감안아나 해 보자.

그래서 한명당 최소 100명은 처치하여 최대 40900명을 없앨 수 있다고 감안해 보자.

 

당시 미군 한개 사단 병력이 1만 2천-1만 5천 정도였으니 당시 일본군도 한개 사단 병력이 약 1-2만 수준이라고 어림짐작해 볼 수 있다.

그리하여 약 3개 사단 정도를 괴멸시킬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과연 한국 영토 내에 고작 3개 사단병력만이 있을까.

 

게다가 한국 전 공간에 근 25개 사단[...]병력이 산재해 있었다는 믿거나 말거나 한 사료가 있었던 것을 보니 409명으론 무리다.

 

델타포스 409명으로도 절대무리다.

 

애시당초 광복군이 일본군을 괴멸시킨다는 사안은 넘겨 두고 조선내 일본 주요 요인을 처리하고, 국내 민중의 봉기를 이끌어 내는 것에 목적을 두고 있었다고 추축해 본다.

하지만 광복군에게 지옥행 급행열차 3등석 티켓을 받은 이런 요인들의 빈 자리는 다시 일본 본토에서 차출되어 배치될 것이다.

 

비록 일본의 사기를 저하시킬 수는 있다고 생각해도 국내 군중들의 봉기를 유도하지 않고서는 우리의 손으로의 독립은 힘들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봉기를 유도해도?

좀 힘들다. 진짜로 25개 사단이면 대충 잡아도 50만인데.

 

즉, 바로 이런 목적이다.

우리는 독립을 위한 우리의 노력을 최대한 했고,

광복군 진입으로 일본에 타격을 가해 일본이 조금이라도 더 빨리 항복할 빌미를 만들고 연합국에게 그에 관한 노력을 인정받아 우리가 우리의 권리를 더 누릴 수 있었을 것이랄까...

 

어쩌면 임시정부가 정식 임시정부로 미군의 호위 아래 당당히 환국하여 연합국의 일원으로 인정받고 곧 대한민국 단일 정부가 세워져 한국전쟁도 일어나지 않고, 무엇보다...

 

바로 지금, 일본이 농사나 짓는 아시아의 스위스가 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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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식으로 '일반 사학'과  '전쟁사'는 상당한 연결 고리를 가지고 있다.

-...사실 태평양전선에 대하여는 문외한이라 그걸 따져 쓰지는 못해 위에서 주장한 바가 적절치 못할 수 있다. 이 점은 양해해 달라.-

 

내가 전쟁사에 관심을 갖는 이유가 '이렇게 틀어지면 그 후는 어땠을까'하는 궁금함이 전쟁사에 관심을 가지고, 집중적으로 연구를 하게 한 직접적 이유라고 해야 하나.

이것 말고 별 다른 이유는 없다.

 

-지금 내가 하는 이 작업은 남에게 '취미를 정당화하자는 거냐' 하고 쓴소리 들을 바에야

내가 먼저 쓴소리 들을, 욕먹을 여지를 없애버리는 것에 그 주를 두는 작업이다. 오해의 여지가 잇을 수 있어 덧붙인다.-

 

그렇지만 내 주장의 근본은,

일반 사학이나 전쟁사나 다 똑같은 사학 내 범주다.

 

즉, 일반 사학도 약간의 어긋남으로 위와 같은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일반 사학중 하나에서 예를 들자면 이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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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만적이 봉기에 성공했다면?-만적의 의도대로 이루어진 결과-

아마도 최충헌의 사망으로 인한 무신 정권의 기반이 막중하게 흔들림과 동시에 당시 노예제를 가지고 있던 국가중 최초로 노예 자유화가 이루어진 나라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뿐일까...?

군사정권의 갑작스런 몰락으로 인한 고려 잡 무관들의 자리다툼, 최충헌의 사망으로 숨통이 약간 트인 문신들과 한몫 잡아나 보려는 소수분자들의 난립.

그리고 여러 외부적 요인[이를테면 금이라던가 몽고라던가...]으로 인하여 고려 왕조는 최악의 경우로는 멸망하는 사태까지 치닫을 것이다.

 

그렇다면? 최악의 경우 한국 역사 자체가 여기서 종말을 맞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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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시피 전쟁사가 아닌 일반 사학인데도 바로 전쟁사와 연관이 되어 버리는 것,

상당히 재미있지 아니한가.

 

이런 과거를 가지고 내 마음대로 생각하고,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는 재미 덕분에 이토록 전쟁사에 매달리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전쟁이라는 제법 흥미진진한 요소가 주를 이루는 전쟁사학을 주로 다루며,

지나간 과거이기에 미래라는 복잡한 요소를 딱히 생각할 필요도 없고,

사학을 가지고 놀기에 제법 고상한 문과생(?) 느낌도 나고.

 

이게 바로 내가 전쟁사 연구를 취미로 가진 가장 큰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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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잠만, 그럼 난 밀덕이 아닌 전쟁사 덕후인가?

└거짓.

2차대전대 미군 공수부대에 관해서는 나름 빠삭하고, 하앍[...]한다.

-하지만 타 분야에서도 빠삭합니다ㅠ-

여기에 덧붙여, 일반적인 밀덕의 특성도 상당량 나타낸다.

전투기 탈출용 낙하산에 관한 잡설

초기 낙하산은 '비행선'이라고 불리우는 비행기가 아닌 날아다니는 거대한 수소풍선의 승무원을 살리기 위해 만들어 졌습니다.

 

그런 이유로, 초기 항공기-전투기-에는 낙하산이 없었습니다.

 

애시당초 전투기가 전쟁에 처음 이용된 1차대전 당시, 전투기란 개념이 대형 비행선의 단순 호위기나 정찰 목적이라 비행기는 그 중요성이 차차 성장해 나가던 시기였습니다.

그러니까, 2차대전 이후의 전쟁처럼 막중한 필요성은 없었습니다.

 

게다가 그때는 항공기 조종사가 단순한 훈련을 거쳐도 조종이 가능한 단순한 기계가 바로 항공기다 항공기 조종사를 '대량생산'할 수 있어 크게 보호할 이유가 없었구요.

무엇보다 그때는 총기나 사걸나 대공시스템이 전무해 항공기끼리의 전투만 적절하게 피하면 항공기의 격추를 사실상 피할 수 있었거든요.

 

-단, 몇명의 예외라면 붉은 남작과 같은 특급 에이스들은 보호를 해야 했겠지만요.-

 

그러나, 힌덴부르크호 사고 이후 비행선의 사용이 급격히 줄고 전투기의 사용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자, 전투기들은 전투기를 격추시키기 위하여 더더욱 발달하게 됩니다. 그러다보니 전투기 파일럿의 양성이 점점 어려워지고, 이제는 이런 무한대적인 인력추출시스템에 무리가 오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써, 전투기 조종사에게 낙하산을 줘서 탈출하게 만드는 시스템을 개발할 필요성을 느껴 결국 몇 차례의 시험 후, 실전배치합니다.

 

그래서 실전배치된 낙하산은...

이때의 낙하산은 파일럿이 직접 캐노피-조종석 유리 덮개-를 열고 비행기 밖으로 뛰어내려 낙하산을 펴 탈출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파일럿이 탈출을 해도 주변 풍속이나 여타 등등등...해서 중상을 입는 일이 다반사였습니다.

 

그런데 이나마도 낙하산이 수동인 덕분에 대공포탄에 피탄당해 단박에 폭발하는게 아닌,

-이건 현대 전투기도 마찬가지인가요?ㅋㅋ;;-

날개라든지 기체 중심부가 아닌 부분이 피탄당해 캐노피를 개방하고 뛰어 내릴 시간을 벌어야 탈출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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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것조차 곧 있어 제트 전투기가 개발되자 이러한 수동식 낙하산으로의 탈출이 절대로 불가능해졌습니다. 음속은 분명히 시작할 때, 공기와 부딪히며 굉음이 들립니다. 이것이 바로 최근 한국의 전주 굉음의 원인이 된 소닉붐 되겠습니다. 음속기 개발 초기, 철강술이 빈약해 이 소닉붐이 일어나기 직전 공기와 부딪혀 전투기가 폭발하기도 햇었는데 몇 겹의 얄팍한 합성섬유로 몸을 감싼 인간의 몸으로 버틸 수 있을까요.

 

그런데 비단 이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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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더가 더욱 발전하여, 결국 전투기들은 레이더망에 걸리지 않기 위해서 지표면에 바싹 붙어 다녀야 했습니다. 어느 정도 높아야 낙하 감속(?) 효과를 보는 낙하산의 특성상, 설령 탈출을 한다고 해도 해발 몇십몇미터 정도였습니다.

 

이러한 모든 이유로 인하여, 새로운 탈출시스템 개발이 절실히 필요해졌습니다.

 

그리하여 개발된 시스템이 좌석사출시스템(정식명칭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냥 이런 형태라 이렇게 이름을 임의로 붙엿습니다.)입니다.

파일럿 의자에 로켓장치를 부착하여 낙하산 작동 유효 범위 위로 띄우는 좌석이 개발되었고, 좌석이 조종석에서 사출되어 하늘로 날아오르는 그 동안 파일럿을 보호하기 위하여 우리가 알고 있는 파일럿 헬멧과 복장이 만들어졌습니다.

 

...사실 파일럿의 복장이나 헬멧 등은 탈출 본연의 목적보다 몸에 가해지는 어마어마한 중력치, 고고도의 저산소대에서 파일럿을 보호하기 위하여 만들어졌다는 성격이 더 큽니다만, 뭐 이찌 됐든, 개발되었습니다.

 

 

2009년 4월 29일 수요일

'공수부대'라는 부대의 이야기

안녕하십니까.

만나서 반갑습니다[...].

그냥 '특전사' 같은 부대를 소개하는 포스팅이 하고 싶어져서[그냥 아무 이유 없이]포스팅합니다.

 

공수부대의 기본 개념

 

'공수부대'[이하 에어본]의 사전적(?)의미란,

'3.000피트 상공에서 약 100Kg상당의 장구류를 매달고 낙하산타고 떨어지는 육군부대'입니다.

 

그리고 비슷하지만 다른 용어'특수부대' 입니다.

이 둘은 사람들이 같은 것이 아니냐는 착오를 굉장히 자주 합니다.

하지만 이 둘은 분명히 다릅니다. 사람들이 이 점에서는 자주 틀립니다.

 

'특수부대'는 낙하산,수중으로도 적진에 투입되어서-어떤 형식으로든지 적진에 투입되어야 했으니 낙하산 강하도 당연히 합니다. 이 점에서 대다수 오해를 부릅니다.-작전을 성공하던 실패하던 작전 종료후 본진으로 도망치는 제네바 협정이 적용 안 되는-한마디로 포로 대접도 못 받는-비정규전 부대입니다. 정규전에 투입되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누가 대놓고 특수 공작 요원들을 적진에 침투시킬까요...

 

'에어본'은 적진에 낙하산으로 강하[강하-降내릴 강,下아래 하] 또는 도보나 트럭으로 전적에 '기습적'투입하여 보병대의 진격로를 뚫어주는 최1선 전투부대입니다.

에어본 투입 형태의 특진상 이 에어본이 적군들에게 고립되어 방법당하는 경우가 대다수입니다.

이러니만큼 대다수 에어본에 관련한 인식은......

'적에게 포위당하는게 일'입니다.

그리고 앞에서 말하였듯이 '2차로 진격하는 보병의 길을 뚫어준다'는 것은,

'정규전 투입 부대'라는 이야기가 됩니다.

 

그러니깐 '아주아주 간략히' 에어본과 특수부대의 차이를 설명해 보면...

'에어본은 적진 강하 후 눌러앉는 정규전 육군 보병부대'

'특수부대는 적진 투입후 작전 성공, 실패 여부에 관계없이 작전 수행 후 도망치는 비정규전 부대'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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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에어본은 적진 강하 후 눌러앉는 정규전 육군 보병부대'

이게 바로 '에어본의 기본개념'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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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어본의 유래

 

미 공군의 아버지 빌리 미첼이 고안했습니다.

그렇지만 모든 신개발품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이 역사의 시작은 안습이었습니다.

1918년 9월의 연합군 대공세 때 도이칠란트군의 요충지 메츠에 1보병사단을 낙하산으로 투하하자는 의견을 제시했습니다.

물론 이는 상부의 반대와 같은 해 11월의 종전으로 무산되었지만 미첼은 그 뒤로도 이 전술을 연구했고 논문으로 공수작전의 유효성을 설파했습니다.

이때야 항공기술이 열악했던 시기에다 인적자원도 변변찮던 시기라, 새로운 전략을 시도해 볼 만한 여력이 없어서 이러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1927년, 파시스트 이탈리아에서 최초로 전투병력의 공수 강하 '시험'되었습니다. 그러나 정규 에어본 편성에 이르지 못한 시험에 그쳤습니다.......

여하간 이탈리아...

 

진정한 첫 시작은 특이하고 새로운 것에 매진하던 혁명 직후의 소련입니다.

'Treasure Of Red army'로 불리던 전략이론가 투하체프스키는 도이칠란트에서 배운 기동전 개념을 자신의 종심전투이론으로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적 후방지역 공격을 파르티잔-빨치산-과 연계함으로서 붉은 군대에 의한 세계 공산화 달성의 전위당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한다."라는 구호와 함께 에어본의 창설에 힘을 기울였습니다...제법 무시무시하네요.


1931년, 사상 최초로 경전차와 76mm포를 포함한 중대규모 병력을 수송기와 글라이더로 낙하시키는데 성공합니다.

 

그리하여, 이에 고무된 소련군은 33년에는 사단규모, 35년에는 군단규모로 공수부대를 확대시킵니다. 특히 35년, 유명한 '키예프 대연습' 당시 세계 각국에서 모여든 군 장교들 앞에서 여단 규모의 공수작전을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시궁창인지 그때까지도 1차대전식 소모전 외는 아웃 오브 안중이던 대부분 서방 군 장교들은 그저 깜짝 쇼 정도로 밖에 인식하지 못했으며 단지 이탈리아와 도이칠란트군 장교들이 '그럴싸 한데' 정도의 반응을 보인걸로...끝났습니다.

아니, 끝나는 듯 했습니다.

 

실력도 없으면서[ㄲㄲㄲㄲ] 화려한 것은 무엇이든지 좋아하던 무솔리니가 서방 최초로 이탈리아에서 정규 에어본을 창설했고 철도모형 덕후에다 군 역사상 최고/최악의 욕심쟁이 괴링에 의해 도이칠란트에서도 에어본이 창설됩니다.

-사실 이 부분에는 말이 많습니다. 원래 다른 장성이 창설한 육군 소속이었던 에어본의 전과를 탐내서 공군 소속으로 옮겼다나...-

결국 사상 최초로 대규모 실전투입을 성공한 것도 도이칠란트였습니다.

-이 작전이 저 유명한 크레타 공방전으로, 도이칠란트 최초이자 최후의 공수작전이 됩니다. 좀 있다 다룹니다.-

 

사족이지만 한편, 정작 소련에서는 '인간백정' 이오시프 스탈린에 의해 시작된 '예조프시나(대숙청)' 으로 인해 그나마 신식 전술에 눈을 떠 가던 군 장교들이 증발하며 대규모 전력공백사태가 발생, 결국 붉은 군대가 농촌 출신 징집병으로 채워지고 이러한 연유로 에어본도 박살나 버렸습니다.

 

...이게 에어본의 역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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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상 실전 투입과 그 결과

 

2차대전 당시 도이칠란트군이 그리스 '크레타 섬'에 공수부대를 강하시켰습니다.

이게 '세계 최초 '에어본'의 실제 전투작전 투입'입니다.

이 작전이 저 유명한 크레타 공방전 되겠습니다.

 

사족이지만 여기에 투입된 도이칠란트 에어본의 이름은 Fallschirmjäger, 펠쉬름예거[폴슘야거,팔쉬름야거,팔쉬름예거...다양합니다.]입니다. 펠쉬름-낙하산/예거-사냥꾼. 즉 낙하산 사냥꾼[강하엽병]이 되겠네요. 별칭이 푸른 악마였던고로, 이하 푸른 악마라고 부르겠습니다.

 

일단 이야기는 1941년, 그리스 본토에서 이탈리아+도이칠란트 기갑부대에게 패퇴해 크레타로 쫒겨간 영국군으로부터 이야기가 출발됩니다.

비록 패퇴한 부대라도 연합군의 일원인 영국군이 크레타를 잡고 있는 고로, 도이칠란트군은 절대로 지중해의 패권을 장악할 수 없었죠.

 

전투차량, 중화기 등 여러가지를 죄다 버리고 왔지만 그래도 무려 2만에 달하는 숫자가 큰 위협이 되었습니다.

크레타같은 작은 섬에 공군을 이용해 폭격을 하자니 크레타 양민의 피해가 불보듯 뻔했고,-양민의 피해라기보단 세계에게 무슨 욕을 들을지 불보듯 뻔했습니다.-

상륙을 하자니 어선을 동원해야 할 정도로 해군력이 변변찮았고,

그렇다고 그냥 놔 두자니 안 그래도 보급때문에 고생하는 북아프리카의 사막의 여우, 롬멜 장군의 아프리카군단 보급 문제부터 남부 이탈리아, 남부 프랑스 등 그 근방의 안보 문제, 하지만 가장 현실적인 문제는 크레타를 거점으로 연합군이 상륙을 개시할 때[북아프리카-크레타-그리스 루트]그리스를 거점으로 상륙을 하면, 도이칠란트 보급망 일부가 발칸 반도 근방에 위치하고 있었던지라 바로 피해를 볼 공산이 컸습니다.

 

그래서, 결국 크레타를 점령하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해군력이 참혹핬던 터라, 새로운 개념인 에어본을 실전에 투입해 보기로 했습니다.

..랄까, 괴링이 지 전공 쌓고 싶어서 나댄게 더 큰 이유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푸른 악마들이 크레타에 강하하게 되었습니다.

일부는 수송기를 타고 크레타 활주로에 안착, 일부는 낙하산으로 강하.

당시 대공포 한 자루조차 가지고 있지 않을 정도로 비참한 전력의 2만 대영제국군에게

이게 만약 기습공격이라면,

엄청난 타격을 줄 수 있었겠지만 연합군의 암호해독술은 도이칠란트군의 암호제작술보다 훨씬 뛰어났던 이유로 크레타의 영국군에게 푸른 악마들의 투입 예정지에 방어선을 구축하는 등의 기회를 줬습니다.

 

하지만 적절한 힘이 없으면 많은 정보도 아무 소용이 없다는걸,

조금 있다 크레타의 2만명 영국군들이 절실히 보여주게 됩니다.

 

그리고, 드디어 강습이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현대인의 시점에서 보기에는 너무나 백괴스러운 방식으로 푸른 악마들을 낙하시킵니다.

 

무기따로 사람따로 낙하했습니다[....]

 

게다가 당시 낙하산은 초창기 낙하산이라 자세조정이 불가능하여

-어께가 아닌 등에서 방사형으로 낙하산과의 연결선이 뻗어나가는 형태였습니다. 1944년 6월의, 어께에서 크게 4가닥, 다시 거기서 각각 연결선이 뻗어나가는 미군 낙하산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뒤떨어진 낙하산이었죠.-

불타는 건물에 떨어진다거나 나무에 걸렸는데 팔이 안 닿아[....] 끊고 내려오지 못해서 포로가 되었다던가 바다에 빠졌[...]다거나...

거기다 직접 가지고 떨어지는 무기는 나이프 한 자루였던 덕분에....

 

크레타 양민들에게 '학살'당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러한 이러저러 악조건 속에서도 푸른 악마들은 열심히 싸웠고, 그 결과 2만 영국군들은 참담하게 뭉그러집니다.

-아마 그들은 그리스에 중화기를 놓고 왔다는 것을 뼈저리게 후회했을 겁니다 ㅠ-

하지만 실패라고 해도 적절한 수준의 피해를 입은 푸른 악마는 그 후 부대 재건까지 상당한 시일이 걸렷고, 이를 본 히틀러는 대량 강하를 금지시킵니다.

 

대량 강하란?
몇개 연대/사단/군단 병력을 낙하산 태워 땅에 내려 보내는 것을 말합니다.
'낙하산부대'하면 사람들이 가장 먼저 떠올리는 '하늘을 가득 채운 낙하산들의 향연' 되겠습니다. 그래서 이건 '에어본의 꽃이자 백미'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이걸 금지시키다니,
부대가 제 역할도 하지 못하게-시쳇말로 '고X를 만들다'라고 합니다.....-만든 가장 대표적인 이 일, 즉 '히틀러의 치명적 오판'중 하나에 속한다.
그리하여 도이칠란트의 대표적인 정예 전투병력중 하나였던 푸른 악마는 자신의 능력을 채 발휘하지도 못한 채 단순한 '공군 육상전투대'로 변환, 노르망디 해안 방위병력으로 차출됐다가 1944년 6월, 낙하산 타고 내려온 미 101공수, 82공수, 영국군 1공수사단에게 제대로 박살나고, 1944년 말 바스토뉴 숲에서 다시 한번 미 101공수, 82공수사단에게 제대로 깨지고 이후, 그 존재가 사라집니다.

 

그리고 현재는 도이칠란트 연방군 공군 폭격유도병으로 그 의미가 한참 퇴색되고...아놔. 이게 대체 뭥미?...여하튼 적절하게 지내고 있다고 합니다.


하여튼 이 푸른 악마에게 충격을 받은 히틀러는 공수를 금지시키고-절망-영국은 SAS와 코만도를 만들고 미국은 레인저와 저 유명한 101공수사단, 82공수사단 등을 만듭니다.-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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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마지막, 번외

 

그러면 이제부터 제 전문분야이자 좋아하는 미군 에어본에 대하여 설명하겠습니다.

'정상적'이라면 코만도, SAS 등도 다뤄야 하지만 이 블로그는 제 블로그이므로[...] 부득이[...] 미군만 다룹니다. 그리고 여기서부터는 어디까지나 번외이므로 딱히 읽으실 필요는 없습니다.


일단 2차대전 당시 미군 에어본은 17공수사단, 82공수사단, 101공수사단으로 나뉘어집니다. 순서상으로 따지자면 82-101-17이 되겠네요. 하지만 17공수사단은 사실상의 예비대로, 1945년 3월에 있던 작전명 버시티 말고는 별 족적을 남긴 게 없어 작전명 버시티가 뭐고, 여기서 17공수가 뭔 짓을 했는지 뒤에서 간단히 다루겠습니다.

 

아니, 그냥 어디까지나 번외이므로 다들 간략히만 다루겠습니다.

18 공수군단

 

뜬금없이 등장한 군단...은 아니고요,

101사단과 82사단이 속해 있던 군단입니다. 이하 아오안.

82공수사단


82공수사단은 라이언 일병 구하기, 밴드 오브 브라더스 등으로 유명세를 탄 101공수사단보다 훨씬 경험이 많은 미군 원조 공수부대입니다.

1942년 이탈리아 시실리에서도 싸웠습니다.


원래는 81 보병사단이였으나 1941년을 직후로 82공수사단으로 임무변경,재창설되었습니다.
그냥 82공수가 이탈리아에서 싸우고 있을 때 101공수가 창설 되었다고 생각하시면 편합니다.
현재는 미국에서 유일한 '낙하산 강하'부대이자 전 세계 어디든 48시간 이내 강하가 가능한 세계 최고 공수사단이라고 합니다. 믿거나 말거나이지만, 동아시아 국가들의 군용 수송기를 다 합친 것 보다 많은 수송기를 가지고 있다고...물론 검증이 안 된 어디까지나 믿거나 말거나 이지만 말입니다.[전 믿고 싶지도 않고 믿을 생각도 없습니다.]


1941년 창설

1942년 이탈리아 시실리 투입
1944년 6월 '작전명 오버로드'당시 101공수와 함께 노르망디 '코탕텡'반도 강하.
1944년 9월 '작전명 마켓-가든'당시 '마켓'작전서 네덜란드 '우덴'에 강하.
1944년 12월 바스토뉴 숲[벌지]에 18공수 소속으로 투입

101공수사단.


101공수사단은 제가 제일 좋아하는 부대입니다.

-그냥, 제 군장 재현 분야가 이 부대입니다ㅋㅋ;; 아니 뭐 그냥 그렇다구요. -
현재 101공수는 낙하산 강하개념인 '에어본'에서 세계 최초이자 유일한 헬리콥터 투입개념인 '핼리본'으로 바뀌었고, 지금은 '서류상'으로만 존재하는 부대입니다.

사족이지만, 현재 주한미군 소속의, 한개 대대를 뺀다 만다 하는 아파치 2개 대대가 바로 101공수사단 소속이고, 이 101공수가 소유한 헬기전력이 한국군 전 군의 그것을 가볍게 능가합니다[....]

 

1942년 8월 창설

1944년 6월 82공수와 함께 '코탕텡'강하.
1944년 9월 마켓작전에서 '아인트호벤' 강하.
1944년 12월 18공수 소속으로 바스토뉴 숲[벌지]에 투입.

-2차대전 중 미 육군 최초, 유일하게 미 육군 최고最高 사단 기장 수여.-

1991년 걸프전

2003년 이라크전


...2차대전 당시에는 역시 '에어본'개념으로 유럽전선에 투입되었습니다.

그리고, 여느 미군 공수사단이 다 그렇듯이 101 공수사단은 원래 보병사단이었습니다.
-101보병사단 창설 연도-1918년 7월 23일.-
그 당시는 1차대전시라 전시를 대비키 위한 '임시편성 부대'라 1차대전 종전 후 바로 해체되었으나 1921년 지역방위개념을 대두로 재창설되었습니다. 사단 사령부는 밀워키.


그리고 재창설 당시 이 부대는 '서류상에만 존재하는 부대'라 한마디로 '예비군부대'입니다.전쟁나면 바로 예비군 소집하는 부대, 즉 현 미군 주방위군-한국군에 비교하자면 동원사단-의 형태이입니다.

하지만 이 예비군부대에도 드디어 햇빛이 들었으니,
1940년 포트 베닝에서 미육군이 최초로 낙하산병 자격시험을 쳤고,

이게 성공하자 이에 고무된 미 당국은 대규모 공수로 적진에 타격을 줄 수 있는 부대를 창설하는데에 대해 희망을 가지게 됩니다.

물론 이때 유럽에서는 푸른 악마에 자극받아 창설된 코만도, SAS가 맹활약중이였습니다.

그리고 이 보병사단의 공수사단으로의 창설 연도는?
1942년 8월 루이지아나의 Claiborne캠프에서 재창설되었습니다.

여기부터는 진짜 사족인데 그리고 이 당시 101보병사단의 공수사단으로의 창설하는데의 주축은 '502공수보병연대'가 주축이었습니다.


그리고 후에 377,321 공수보병연대, 907 포병연대와 327.401 글라이더 연대도 합류.
밴드오브브라더스로 유명한 506연대는 1943년에 합류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101공수는 참 재미있는게, 분명 '에어본'인데 글라이더[무동력 항공기]로 강하하는 327,401 글라이더 연대가 한개로 엮어져 있습니다.

-애시당초 포병대는 그게 어떤 종류의 사단이건, 하나씩 다 있습니다. 이건 현행 한국군도 마찬가지.-


글라이더연대는 '지프,야포,낙하산으로 투입되는게 두려운 공수부대원들'을 투입하기 위하여 만들어졌습니다. 그리고 이 연대는 점프슈트를 입어야 했지만 글라이더 연대 병사들은 일반 보병이 입는 필드자켓을 입었습니다.


이게 '공수 기장'소유한 공수부대원들의 자존심이 얼마나 센 지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공수 기장'은 '공수 시험'을 통과한 공수부대원들에게만 주어집니다. 앞에서 나온 최초의 낙하산병 자격 시험이 이겁니다. 낙하산 타는데 무슨 자격증이 필요하냐 물으시면...사실 낙하산은 초속 2M 정도로 떨어뜨리는데 이거 타고 떨어지다 다치지나 않으면 다행입니다.

사족이지만 현행 한국군 장교들에겐, 이게 고급 장교가 되기 위한, 일종의 필수요소 되겠습니다.-

 

작전명 버시티

 

개요-루르 공업지대 타격을 위한 양동작전(?)

전개-패튼장군이 라인강을 도하하여 본격적으로 도이칠란트 본토를 타격하기 전, 먼저 루르 공업지대를 방위하는 도이칠란트 B집단군의 시선을 끌, 무언가가 필요했다.

원래는 18공수군단 병력을 차출하여 사용하려고 했지만 후에 있을지 모르는 베를린 강하작전에 쓰기 위하여 아껴둔다. 그래서 결정된 사단이 17공수사단.

 

결과-이 17공수사단은 채 땅도 디뎌 보기 전에 1735명이 사망하고 6600명이 부상당하는 예상치 못한 결과를 낳았지만 B집단군의 시선을 끄는 데 성공,

패튼 장군이 루르 공업지대를 공격, 마지막 남은 도이칠란트의 전투수행능력을 앗아가 같은 해 5월, 도이칠란트의 항복을 불러왔다.

 

후기-도이칠란트 B집단군이 히틀러 유겐트에 공군 정비병에 노무자에 러시아 포로에 온갖 허섭스레기가 다 동원된 급조된 병력이라고 해도...이정도 피해는 좀 심했다. 그리고 이 패배로, B집단군을 지휘하던 모델 원수는 숲에 들어가 권총자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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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공수부대(?)

 

한국에는...산악 지역의 특징상 강하작전에서 피해를 볼 가능성이 많아 공수사단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만 특전사가 이 기능의 일부를 수행합니다. 그래서 특전사=공수부대=특수부대라는 백괴스러운 공식이 성립되었고, 심지어 특전사 마크 중에는

'대한민국 공수특전단 KOREA AIRBORNE'라는 명칭을 찾아 볼 수 잇는 것을 보아하니, 한국에서는 공수부대가 특전사의 개념이로 보여지고 있다고 보셔도 무방합니다.

특전사 아래에 대규모 헬기전력으로 강습작전을 수행하는 203특공여단-구 1공중강습여단-이 있고 심지어 1,3,5 특전여단을 하나로 묶어 공수사단으로 만들려는 움직임이 있었던 것을 보아하니 한국군에서 공수부대란 명칭이 차지하는 위치는 특전사=공수부대=특수부대 이 이상도 이하도 아닌 듯 합니다[...]이는 빈대떡을 보고 피자라고 하는 것과 매한가지입니다. 라면보고 짬뽕이라거나 짜파게티보고 짜장면이라거나...

 

아ㅠ

2009년 4월 8일 수요일

엽기 혹은 진실-엽혹진? 카페 이름 패러디 아님;;;-

4. 88올림픽 당시 화형당한 비둘기가 있다?

<참새 이겨라 ㅠ>

일반적인 경우, 올림픽 주최국들은 각각의 독특한 방식으로 개막식을 하여 자신의 국가를 더욱 부각시킵니다.
하지만 대한민국, 즉 우리나라의 경우,
본의 아닌 그로테스크한 연출로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었으니....

개막식때 날려 보낸 비둘기가 문제가 되었습니다.
비둘기를 날렸는데...날리긴 날렸는데 그노무 비둘기들이...
그때부터 닭둘기로의 진화유전자가 발현했던건지 여하간, 그들 중 하나가 불이 붙기 시작한 성화봉송대에 착륙[....]했습니다.
당연히 자동점화장치+성화봉송으로 연계된 가스연소를 사용하는 불구덩이 속에서
그 비둘기는 참혹한 '가스불구이'가 되고 말있습니다..........

그 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는 서울에서의 이런 경우를 막기 위하여 비둘기를 폐막식에 사용하기로 하여 서울의 그것과 같은 사태는 면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좀 특색있게 하겠다고 불화살로 성화를 봉송했는데.....
멀리서 보기에는 적중했는데 사실 보니까 몇 야드는 빗나갔습니다.
참으로 어마어마한 대사건이 될 뻔했습니다.
다행히 자동 점화장치의 도움으로 성화에 불은 붙였다고 하네요 -ㅅ-;;;

5. 삼풍백화점 사고는 단순히 '돈'에 미친 자의 '지랄'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삼풍백화점 사고는 너무나 잘 알려져 있지만 '황금만능주의'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다시 한 번 부각하기 위하여 작성합니다.-

<뒤에 보이는 대법원 건물이...>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1995년 6월 29일 오후 5시 57분 서울특별시 서초구 서초등에 있던 삼풍백화점이 붕괴된 사건으로, 건물이 무너지면서 1천여 명 이상의 종업원과 고객들이 다치거나 사망했다. 사망자는 501명, 부상자는 937명, 실종 6명, 피해액은 약 2700여억원으로 집계됐다.

사건의 진행은 이렇습니다.

1995년 4월, 건물의 5층 남쪽 천장 가에서 균열이 발견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취해진 조치는 최고층에 있던 상품과 상점들을 지하로 옮기는 것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5월, 균열의 수가 상당히 많아졌으며, 검사 결과 '건물의 붕괴 위험이 있다'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그리고 붕괴 5시간 전, 5층에서 큰 파음이 몇 차례 들려왔습니다. 이건 옥상의 에어콘 진동에 의한 것인데 이나마도 백화점 직원이 아닌 백화점 고객의 신고로 포착, 백화점측은 에어콘을 정지시켰습니다. 하지만 이미 옥상의 균열은 10CM이나 벌어진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오후 5시 경, 4층의 천장이 가라앉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이때 취해진 조치는 고객들이 4층으로 가는 것을 막는 것.

그리고 건물이 붕괴되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던 오후 5시 50분 경이 되어서야 이들은 비상벨을 울리고 고객들을 대피시키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불과 7분 후, 옥상이 무너져 그곳에 있던 에어콘 실외기가 5층으로 추락, 이 충격으로 건물의 중심 기둥이 무너지고
남쪽 건물은 단 20초만에 무너졌습니다.
그리고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고객, 직원 1500여명은 모두 매몰되었습니다.

혹자는 무리한 설계 변경이 이 원인이라고 하지만 결론은...따지고 보면 돈에 미쳐서 생긴 일이었습니다.

당시 회장이던 '이 준'-개새끼인고로 실명을 공개합니다.-이 수익을 위하여 독단적으로 건물 구조를 변경하였습니다.
-참고로, 그때는 어쨌는지 몰라도 지금은 법률상 일정 규모 이상의 건물의 설계는 전문 건축가가 해야 합니다.-

원래 근린상가로 지어질 건물을 백화점으로 변경하고 4층이던걸 5층으로 시공할 것을 요구했다죠.

하지만 시공사가 붕괴위험으로 시공을 거부하자 자사 계열사가 시공했습니다.
그 추가된 5층에는 롤러스케이트장이 설치될 예정이었으나,
돈에 미친 경영진-이하 '개새끼'들-은 5층을 대형 음식점으로 바꾸었습니다.
그런데...그냥 식당이었으면 말을 안 할 지도 모르겠는데 좌식 식당이었답니다.
그리고 여기다 온돌을 깔았다네요.


게다가 그 계열사는 기둥 지름을 25% 줄이고 에스컬레이터가 있는 부분은 더욱 더 깎아내렸습니다. 여기다가 덧붙여, 층바닥의 두께도 충분치 못했고 용도와 다른 철근을 사용하는 등, 그야말로 '개막장'을 달렸습니다.
하지만 무려 6년을 버티다니 그냥 하늘이 도우셨다는 말 밖에는...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닙니다.
옥상에다 설계하중의 무려 4배에 달하는 29T짜리 에어콘 실외기-앞에서 나온 그 실외기들-를 무려 3대를 설치하였습니다.-'대충 때려잡아' 12배는 넘어갑니다.-
그런데 이게 계속 가동되자 아파트 주민들이 이거 소음으로 민원을 넣어서
붕괴 2년 전에 반대쪽으로 옮기는데...

이 '개새끼'들이 기중기를 써서 옮기지를 않고 롤러를 써서 반대쪽으로 옮겼습니다.
당연히 설계하중의 12배를 넘어가는 것들이 옥상을 휩쓸고 지나가자...

어떻게 되겠습니까.
 옥상 전체에 균열이 생깁니다.
그 덕분에 이 균열을 견디지 못해 5층에 있던 기둥이 옥상을 뚫고 올라가고, 결국 이를 버티지 못한 건물은 도미노 무너지듯이 와장창 무너져 버립니다.

법의 심판

1996년 8월 23일 대법원에서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관련 피고인들에 대한 판결이 확정되었다. 삼풍백화점 회장 이준에게 징역 7년 6개월이 확정되었다. 삼풍백화점 측으로부터 뇌물을 받고 설계변경 등을 승인해 준 서울 전 서초구청장 이충우, 황철민에게는 각각 징역 10월에 추징금 3백만원과 징역 10월에 추징금 2백만원이 확정되었다. 정상기 전 서울시 상정계장, 김수익 우성건설 형틀반장, 김재근 전 서초구청 주택과장 등 피고인 10명도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과 추징금 3백만원에서 선고유예 및 추징금 1백만원의 원심형량이 확정됐다. 2심에서 징역 7년형을 받은 이한상 전 삼풍백화점 사장 등 12명은 상고를 포기하여 형이 확정됐다....

대법원도 돈을 좀 먹기는 먹었나 보네요.

무고한 501명의 국민이 한 개인의 욕심에 의해 죽고 6명이 실종되었는데
꼴랑 7년 6개월?
이런 개새끼들은 필요악으로도 설명이 안되는 존재들이에요.

이건 여담이지만 당시 구조작업에서는 구조장비가 심각할 정도로 부족하였고 전체 구조대원들의 ⅓에 육박하는, 취재에 투입된 일부 언론인들은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하여'라는 미명 하, 구조작업을 대놓고 방해하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구조대원들도 어째서인지 자동차 기름으로 인해 지하주차장에 난 불을 물로 끄는 등, 구조작업도 막장을 달렸다고 합니다.-하지만 이게 최후 생존자 3인의 생존에 엄청난 도움이 되었습니다. 구조대만큼은 막장이 아니었던 듯.-그리고 최후 생존자 3인이 나오기 전에 건물 잔해를 수습하여 사망자의 유해가 건물 잔해에 섞여들어가는 등, 거기다 특전사, 민간인, 유가족 등이 사비로 구조장비를 구입하여 구조하려는 노력조차 막는 정부 등, 아주 점입가경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삼풍백화점의 충격으로 정부 차원에서 취한 전국의 모든 건물의 안정성 검사 결과, 단 2%만이 안전하다는 결과가...

그리고 현재 삼풍백화점이 잇던 그곳에는, 대림 아크로비스타 건물이 들어섰다고 합니다.
다들 알다시피 서초구 서초동은 상당한 부잣집 동네인지라 어느 땅이고 놀려둘 재간이 없었던 거죠 뭐.

그런데 현장에 위령비 하나 안 세워 두는 건 대체 뭔 심보일까요.

여하간...

그리고 상당히 많은 괴담을 만들어내고-지갑에 돈이 없어져 나왔더니 건물이 무너졌는데 지갑 안에 돈이 들어있다더라, 내가 장난감 사달라고 때를 써서 할머니가 장난감 사러 갔다 죽었다던가, 아이가 무섭다고 나가자고 졸라서 나갔더니 건물이 무너져서 아이한테 왜 나가자고 물었더니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사람들 목을 붙잡고 서 있었다던가 주변 지하철역에서는 삼풍백화점 마크가 그려진 쇼핑백을 든 아주머니가 아이랑 지하철을 탄다거나 아크로비스타 지하주차장에서 귀신을 봤다던가 괴음성을 들었다던가...하여간 대표적인 도시괴담으로 널리 퍼져 있습니다.- 노래 가사에도 그 이름을 나타내는 등-바람이 부는데야 어쩔수 없겠지만 절대로 삼풍은 또 불지 않았으면-, 한국 공포영화계의 한 획을 그은 연화, '소름' 등, 한국 사회에 미친 영향이 굉장히 큽니다.

이건 제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현대 한국인들에게 다섯 손가락 안에 들 만한 충격을 주었다고 생각됩니다.


6. 조형기 시체유기 사건...?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대부분 기억하지 못하는 사건입니다.
사건의 전말은 이렇습니다.

<사진출처 미상>

1991년 당시 33살이었던 조형기는 만취상태에서 30대 여성을 차로 치여 죽였습니다.

그리고 그 여성의 시체를 끌고 가서 사고지점으로부터 12M 떨어진 곳에 버렸습니다.

이건 엄연한 시체유기 살인사건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차에서 잠들었습니다.

 

물론 다음날 아침 경찰에 발견, 체포되었습니다.

법원에서 5년형을 받았지만, 1년 후에 다시 방송에 출연했구요.

아마 감형을 받고, 보석으로 풀려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여기서 생각해봅시다.

자기 가족을 음주운전으로 죽이고 시체까지 유기한 사람이 TV에서 웃고 떠들고 있습니다.

게다가 인지도도 좀 있구요.

 

이런 조형기를 방송에 내보내는 방송사도 그렇고 방송에 출연하는 조형기도 조형기거니와 살인자가 TV에 나오는 대한민국의 현실도 웃기지 말입니다.


이뭐병 -ㅅ-


<사진출처 미상>


상대적이지 못하고 그런다고 절대적이지도 못하지만 사실을 담은 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