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7월 13일 월요일

003. 1944. 12. 16. His last resistance

-002. 1944. 08. 15. Mission for Our Future에 이어서 연재합니다.-

2편에서 예고한 바와 같이 이번에는 히틀러 산하 제3제국의 공식적 최후 저항인 바스토뉴 숲의 벌지 전투에 대하여 다루겠습니다.
그리고 원래 예정대로라면...
저 불그죽죽한 사각형[...] 안에 있는 내용대로 되어야 했지만 전 근성이 없어서요[...]
실은 이쪽에까지 손대면 이 카테고리를 子블로그로 떨궈 내야 할 정도로 어마어마해져서 어쩔 수 없이 이 항목은 넘어갑니다.
그러면 이상 잡설은 줄이고 시작합니다.
.
.
.
일단 아주 기본적으로 작전명의 유래, 입안자를 살펴 보겠습니다.

벌지 전투(Battle of the Bulge)는 제2차 세계 대전 후반기, 서부전선에서 도이칠란트 제3제국의 최후 대반격에 대해 연합군이 붙인 이름입니다.

여기서 왜 벌지 전투라고 붙였냐 하믄...
도이칠란트군의 진격에 의해 전선의 일부가 돌출된 것을 가리켜 미군이 붙여준 이름에서 유래되었습니다.
그리고 영어로 '돌출된'이라는 뜻을 가진 것은 벌지(Bulge)라, 벌지 전투가 되었습니다[...]
영화 벌지 대작전 이래로 벌지전투란 명칭이 사실상 일반화되었습니다.
도이칠란트군은 작전명 라인을 수호하라, Unternehmen 'Wacht am Rhein' 이하에서 대공세를 펼쳤습니다. 대반격은 서부전역사령부-Oberbefehlshaber West-사령관이었던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원수에 의해 입안된 것으로 룬트슈테트 공세-Rundstedt-Offensive-혹은 지명에서 유래된 아르덴 공세-Ardennenoffensive-로 불리기도 합니다.
.
.
.
1944년 9월 4일, 영국군은 벨기에의 앤트워프를 해방하였지만, 보급거점으로써 사용하기 위해서는 근방의 도이칠란트군을 몰아낼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이걸 어디다 써 먹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이리도 한심한 생각 덕분에, 즉 가지고 있는 것을 제대로 써 먹지 않겠다는 영국 덕분에 보급선이 길어져 연합군의 진격은 정지되고 전선은 교착상태가 되었습니다.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9월 17일 버나드 몽고메리 장군이 계획한 마켓-가든 작전이 개시되어 도이칠란트 본국에 대한 침공이 시도되었으나 현지 사정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오로지 전공만을 위한 작전이었기에 몽고메리가 말하길 80%의 성공이었다지만 실은 08%의 성공이었다구요-ㅅ-
해서 전선은 다시 교착상태가 되었습니다.
이 작전이 이 모냥이 나서 연합군은 제법 큰 피해를 입었던 터라 일시적으로 진격을 중지하고 엄청난 문제가 된 보급대책의 해결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한편 동부전선, 폴란드 동부에서는 소련에 의한 작전명 바그라티온이 끝나가던 시기였기에 소소한 쉬는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기회를 놓칠 리 없던, 이미 코너에 몰릴 대로 몰린 히틀러는 자신이 가진 마지막 패를 던지는 대반격작전을 구상했습니다. 말하자면 1940년 개전 초기, 프랑스에 대한 전격전 승리를 리인엑트-재현. ㄷㄷㄷ-하는 것으로 벨기에 아르덴 지방의 삼림지대를 기갑부대로 돌파하여 단번에 앤트워프까지 진격하여 탈환, 서부전선 북쪽의 연합군을 포위, 괴멸시킨다는 작전안이었습니다.
물론 당시 도이칠란트의 군사력으로 봐도 꿈에서나 꿀 정도의 반격작전인지라 수뇌부의 룬트슈테트, 발터 모델은 당연하게도 반대했으나 히틀러는 그 꿈을 사실로 믿고서 이 작전의 성공으로 서부전선이 정체된다면, 이로써 연합군이 쫄아서 자기네하고 강화한다면 동부전선에 전력을 집중할 수 있을 거라고 추측했습니다. 은근히 불쌍합니다. 이거 뭐-ㅅ-

그리고 또 다른 작전안으로써 북부에 광대한 전선에 분산된 코트니 H. 하지스 장군 휘하의 미국 제1군을 협공하여 괴멸시킬 것을 제안했습니다. 아무래도 아무리 1개 군 병력-1개 군 병력이 최고 8만명 수준.-이라도 광대하게 분산된다면 적군의 분산포위, 각개격파가 쉽고 아군의 피해도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었습니다만...

노르망디 상륙작전 중 32만 6천명을 상륙시키고 그 후에도 속속 병력이 증원된 방대한 병력을 가지고 있던 연합군 전력의 소수를 줄이는 것 말고는 성과가 없어 이건 아무래도 전세를 역전시킬 방법이 아니었기에 그냥 버렸습니다.

...해서 작전시기는 아르덴 숲이 안개에 휩싸이는 겨울로 잡았습니다.
이미 제공권은 연합군으로 옮겨졌기에 항공기에 의한 격렬한 폭격으로부터 부대를 숨기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도이칠란트군은 그토록 극심한 인력난에도 불구하고 무려 20여개 사단을 준비하고 신예전차인 티거 2도 포함시켰으나...뚜껑을 열어 보면 동부전선에서의 출혈의 영향 때문에 거의 모든 부대가 정원을 채우지 못하였고 훈련도가 낮은데다 이 20개 사단 중에 민방위사단(?)만도 못한 새로 편성된 국민척탄병사단까지 투입시킬 정도였습니다.
아무래도 시기가 시기인지라 군수품과 연료의 부족도 심각할 정도로 증가하여 만족할 만한 양을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허나, 작전에만은 1944년 전쟁 중 최대치에 도달한 도이칠란트 병기 생산량의 대부분이 투입된 병력으로 작전에 대한 기대가 컸습니다.

하지만 공격을 예정대로 진행하기 위해서는 작전중 연합군의 보급 거점을 탈취할 필요가 있는 등...
처음부터 상당한 위험부담을 안고 있던 작전이엇습니다.
만약 한 가지라도 잘못되는 상황이 벌어지면 작전 전체에 심각한 영향을 줄 가능성이 매우 높았지 말입니다.
.
.
.
한편 연합군 수뇌부에서는 도이칠란트군 집결정보나 공세작전의 징후를 보고받았으나 도이칠란트에게는 공세에 나설 여력은 남아있지 않다고 판단, 다시 한번 작전명 마켓-가든에서의 우를 범하고 맙니다. 오죽하면 아르덴지방은 깊은 삼림과 산악지대였기에 기갑부대가 쉽사리 통과할 수 없다고 판단, 이 지역의 방위에는 이제껏 전투의 선봉부대로써 이미 전투력을 거의 상실한 병력을 배치, 여기서 재편성을 할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이 생각은 엄청난 출혈를 맛보게 해 주었습니다.
게다가 연합군 수뇌부는 도이칠란트군이 1940년에 같은 지역에서 영국과 프랑스의 연합군 사이를 뚫고 기갑사단으로 프랑스에 쳐들어갔던 적이 있었다는 것을 완전히 잊어먹고 있었습니다.
.
.
.
원디 도이칠란트는 9월 중순에 아르덴 숲을 통과하여 공격을 감행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주력은 서쪽으로 진격하여 뮤즈강까지 도달한 뒤 북서쪽의 앤트워프와 브뤼셀로 진격할 예정이었습니다. 가장 곤란한 것은 작전개시로부터의 신속한 이동이라 생각할 수 있으나, 뮤즈강을 넘는다면 극적으로 전세가 역전되어 해안까지 도달이 가능할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리고 이 작전은 연합군 첩보본부에 라인란트의 방어작전과 오인시키기 위해 '라인을 수호하라, Wacht am Rhein'라고 이름붙여졌습니다. 이것은 도이칠란트의 노래에서 따온 명칭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공격의 성공에는 3가지 요점이 요구되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1. 공격은 완벽한 기습이어야 한다.
2. 악천후여야 한다.-연합군의 제공권을 무효화, 보급로를 확보.-그래서 시기는 겨울 중에도 혹설기로.
3. 신속한 진격이어야 한다는점. 모델 원수는 뮤즈 강까지 4일만에 도착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1944년 12월 16일, 도이칠란트군은 벨기에 아르덴숲을 통과해 진격을 개시했습니다. 아무래도 시기가 시기였던지라, 게다가 숲인지라 안개와 같은 악천후의 힘으로 인해 연합군은 항공기를 띄울 수 없어 도이칠란트군은 상당한 도움을 받았습니다.

여하간 기습으로 허를 찔린 미들턴 장군의 미국 제 8군-현재 한국에 주둔하는 미 8군과는 연관이 있을지도...?-은 클레르보, 호지겐 등 일부거점에서 완강하게 저항했으나 여단, 연대, 대대등 고급 지휘관의 전사 및 부상-각각 준장, 대령, 중령 혹은 소령-이 속출하여 지휘체계가 괴멸되어 부대가 와해된다거나 지휘관의 부재로 작전통제가 되지 않아 포위되거나 하는 위급한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충격과 혼란을 틈타 벌어진 도이칠란트군의 쾌진격은 작전 개시 후 수일 동안만 계속되었을 뿐이었지 막상 12월 하순에 이르자 도이칠란트군의 주력부대는 여러 지역에서 급히 증파된 연합군-주축은 미군.-에 의한 강력한 저항을 만나 전진은 이제 정체됩니다. 그리고 개별 전선의 진격속도도 큰 편차가 생겨 속공에 성공한 부대가 역관광당하는 사태가 속출했습니다.

처음에 히틀러는 연합군이 이 사태에 대응하는 데 시간이 어느 정도 걸릴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도이칠란트군의 대규모 공세라는 것을 인식하는 데 수일, 아이젠하워가 각국 수상과 상담하여 부대의 배치전환을 명령하는 데 수일, 그리고 배치전환 명령을 받은 부대가 현지에 도달하는 데 수일이 걸릴 것이라고 내다보았습니다.
이 정도로 시간이 걸린다면야...작전은 틀림없이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만 아이젠하워는 히틀러의 수하들과는 달리 상당한 부대 배치에 대한 재량권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로써 대규모 공세라는걸 파악하는데, 부대 배치에만 시간이 걸려 사실상 히틀러의 생각은 초장부터 어긋나기 시작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써 당시 프랑스에서 재건 중이던 101 공수사단을 바스토뉴로, 82 공수사단을 생비트로 급히 증파했습니다. 이것으로써 도이칠란트의 반격작전은 어긋나기 시작했습니다!
.
.
.
그리고 12월 23일, 날씨가 회복되면서 연합군은 공중폭격과 공중보급을 개시했습니다. 항공폭격은 도이칠란트군의 보급기지를 안드로메다 워프게이트에 태워 보냈고 전투기들은 도로상의 도이칠란트군을 공격했습니다. 거기에 포위된 바스토뉴에 대해 공중보급으로 의약품, 식료, 모포, 탄약이 보급되었습니다. 그리고 지자원한 외과의사팀이 글라이더로 현지에 투입되어 부상자 구호작전을 실시했습니다.

한편 12월 24일, 보급선이 늘어지다 못해 끊어진 도이칠란트군의 진격은 뮤즈강 근처에서 정지했습니다. 아무래도 연료와 탄약의 고갈이...또한 작전이 개시된 뒤 도이칠란트군은 무선봉쇄를 해제, 연합군 정보부는 손쉽게 도이칠란트군의 위치를 알아내어 시기, 상황 적절한 반격이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점에서 도이칠란트군의 손실은 제법 경미한 상황이었습니다.
해서 24일 밤 한스 폰 만토이펠은 작전의 중지와 철수를 요청했으나 히틀러는 이를 거절하였습니다.

그리고 패튼의 제 3군은 바스토뉴와 바스토뉴에 포위된 부대를 구원하기 위해 전투를 계속했습니다. 마침내 12월 26일 16:50분, 제 3군예하 4기갑사단의 일부가 바스토뉴에 도달하여 포위망을 깼습니다.
그리고 시간은 어느새 지나 1월 13일, 도이칠란트군은 바스토뉴에서 퇴각했습니다.
종래에는 1월 23일, 도이칠란트군 사령부에 의해 작전중지가 결정되었습니다.
이리하여 전투는 공식적으로 1945년 1월 27일날 종료되었습니다.
.
.
.
그리고 이 작전이 끝나고...히틀러의 바램과는 달리 그저 겨울날의 백일몽으로 끝났습니다.
이 작전 덕분에 도이칠란트에 그나마 남아 있던 도이칠란트의 전투부대, 보급망은 사실상 소멸되어 연합군의 진격을 더욱 더 앞당겼고, 이 덕분에 동부전선에 병력을 투입할 여력조차 없어...
히틀러의 소망과는 달리 결국 전쟁을 더욱 더 빨리 앞당기는 결과를 낳고 말았습니다.

역시, 꿈은 혼자 꿔야 제맛입니다. ㄷㄷㄷ
.
.
.
그럼 다음 4부로는...
노르망디니 어디니 하여간, 그런 지역에서의 세부 작전을 다루려고 했습니다만 위에서 다룬 이유로써 그냥 접습니다;ㅅ;
해서 4부로는 08%의 성공을 거둔 작전명 마켓가든을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작전명 밀덕의 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