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0월 25일 일요일

005. 1945. 03. 24. Buried last stage

-004. 1944. 09. 17. Fight for Our Conceit에 이어서 연재합니다.-

4편에서 예고한 바와 같이 이번에는 2차대전 기간 동안 미국이 유럽전선에서 마지막으로 참가한 전투인 작전명 버시티를 다루겠습니다.
여하튼,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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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12월, 연합군은 히틀러의 꿈을 위시한 도이칠란트군의 대규모 반격을 이를 막아내고 1945년 03월 경, 라인강 서부를 정리합니다. 이 와중에 버나드 몽고메리 장군의 영국 제21집단군은 3월 9일자로 라인강 도하를 위한 작전-작전명 플런더-Operation Plunder- -을 시행합니다.

당시 라인강 서부에서 도이칠란트 본토침공을 위해 대기하던 연합군 병력은 영국군 11개 사단, 6개 독립여단, 캐나다군 8개 사단, 미군 11개 사단. 대략 128만명이군요.
이거 말이 128만명이지 현대 한국군 평시 정규 병력이 약 60만여명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자면...ㄷㄷㄷ
게다가 도하 지원을 위해 대기중이던 공병의 숫자만 5만 9천 명이던 판이었습니다. 여기에다가 보급량도 실로 엄청납니다. 그냥 영국, 미국군 각 군 보급품 숫자만 살펴 봐도...
영국 제2군 11만 8천톤, 미군 제9군 13만 8천톤[...]

여튼 이런 건 제쳐둡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도이칠란트가 불쌍해집니다 ㅠ

여튼간, 연합군 수뇌부는 라인강 도하에 앞서 이 작전의 성공을 확신하기 위해서 공수부대의 투입을 결정합니다. 당시 대기중에선 투입선상에 오른 공수사단 중 영국군 1공수사단은 마켓-가든 작전에서 엄청난 피해를 입어 작전투입은 불가능합니다.
그리하여, 작전명 오버로드 이후 늘 최전선에서 활약하던 두 공수사단, 미군 82, 101공수사단과 신참사단 13, 17공수사단, 영국군 6공수사단이 물망에 올랐습니다.
그리고 이들에게 작전이 하달됩니다.
그 이름하며 작전명 버시티-Operation Varsity-, 그리고 이들의 임무는 이렇습니다.
라인강 동부 루르 공업지대+a를 타격하기 위해 라인강을 도하하는 연합군 병력들에게 도이칠란트 B집단군이 시선을 끌지 못 하도록 양동작전을 펼치는 동시, 교두보를 장악한다.

하지만 이렇게 많은 병력이 뛰어내리면서-총 21680명- 마켓-가든 작전에서 붉은 악마들을 날려 버린 경험이 있던 연합군 수뇌부는 이들의 작전을 도하하는 부대의 규모에 걸맞지 않게 축소시킵니다.
즉, 도하에 앞선 교두보 확보가 아니라 그저 양동작전으로 축소됩니다.

사실 3월 24일, 연합군의 도하에 앞서 당일 오전 10시에 강 동부에 3개 사단이 통째로 쏟아져 내릴 계획을 세웠지만 연합군의 상징이던 물량이 드디어 달리기 시작...은 아니고 수송기가 모자라서 2개 사단으로 축소됩니다.

사실 이 2개 사단으로 18공수군단, 역전의 용사(?)들인 미 82, 101공수사단을 쓰려고 했으나 이들은 후에 있을지 모르는 베를린 강하작전을 위하여 남겨 두고 영국 6공수사단과 미 17공수사단이 지명됩니다.

그리고 공수부대로 새로 개편된 미 17 공수사단을 시험해 볼 필요도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이 작전에 투입된 대략적인 항공기의 수는...
수송기 1600여대, 글라이더 1300여대, 호위 전투기 889대, 보급강하용 폭격기 240대, 지원 전투기 2100여대, 지원 폭격기 821대[...]
아니 수송기 모자랐다며[...]
워낙 압도적인 화력으로 도이칠란트군을 데꿀멍시켜버리는 바람에 처칠과 아이젠하워까지 와서 이 작전을 지켜보았습니다. 오죽 전선이 안전(!)했으면...

드디어 확실히 결정된 이 작전의 형태는 아래와 같습니다.

기본 개요-연합군 도하병력의 루르 공업지대 타격을 위한 양동작전(?)

전개(?)-패튼장군이 라인강을 도하하여 본격적으로 도이칠란트 본토를 타격하기 전, 먼저 루르 공업지대를 방위하는, 한 마디로 라인강을 도하하자마자 마주칠 적 부대인 도이칠란트 B집단군의 시선을 끌 무언가가 필요했다. 그리고 그 시선을 끌 무언가가 바로 작전명 버시티로 투입될 공수부대.


그래서, 여튼간, 하여간, 어찌 되었던 강하는 시작됬습니다.

미 17 공수사단 507공수보병연대가 도이칠란트 베젤(Wessel)시에 강하해 이 주변에 포진해있던 도이칠란트 84보병사단과 접전을 벌였습니다. 하지만 해당 사단이 그간 엄청난 압박을 당하던 터라 제대로 전투도 하지 못하고 결국 박살나고 길을 내 줍니다. 동 사단 193글라이더보병연대의 강하율이 무려 90퍼센트에 이를 정도로 17사단의 작전은 완벽한 편이었습니다.

일단은 그렇게 보였습니다.

하지만 동 사단 513공수보병연대와 영국 6공수사단은 예상보다 극심한 대공포화에 밀려 서둘러 강하를 하는 바람에 영 좋지 않은 곳에 강하를 했으나 마켓-가든때와는 달리 거침없이 해당 목표로 달려가 도이칠란트군을 제압합니다. 아무래도 작전범위가 좁아-이들이 떨어진 곳이 바로 루르 공업지대- 도보로도 기동에 큰 문제가 없었던 탓이지요. 게다가 여기 부대 상태가 영...

이건 뒤에서 설명하겠습니다.

어쨌든 이런 식으로 도이칠란트 B집단군이 제압되면서 연합군은 안정적인 도하를 마칩니다.
하지만 연합군 수뇌부는 이렇게 간결한 작전에 이렇게 대규모의 공수작전을 펼칠 이유가 있었냐는 회의론자들을 마주합니다.

하지만 이들은 무시당합니다.

회의론자들이 나타난 이유는 작전 첫 날 공수부대에게 잡힌 도이칠란트군 포로가 3천여명이 이를 정도로 압도적인 전투였습니다.

하지만 강하 도중의 피해가...
땅도 디뎌 보기 전에 무려 1735명이 사망하고 6600명이 부상당하는 예상치 못한 결과를 낳았습니다.
하지만 B집단군의 시선을 끄는 데 성공, 패튼 장군이 도하하여 루르 공업지대를 공격, 마지막 남은 도이칠란트의 전투수행능력을 앗아가 같은 해 5월, 도이칠란트의 항복을 불러왔습니다.

 

사실 이 버시티 작전이...피해가 상당히 막심한 편입니다.
당시 루르 공업지대의 방어를 하던 도이칠란트 B집단군은 이제 전투력이라고는 0이던 도이칠란트가 급하게 급조한 소방대입니다.
히틀러 유겐트에 공군 정비병에 노무자에 러시아 포로에 온갖 허섭스레기가 다 동원된 병력인지라.
그리고 이 패배로, B집단군을 지휘하던 도이칠란트군의 소방수 모델 원수는 숲에 들어가 권총자살했습니다.

어찌되었든 연합군은 5일만에 도하를 마쳤고, 버시티 작전도 2일만에 완벽하게 종료됩니다. 이 작전은 훗날에도 떡밥을 던져도 뭥미? 하는 작전이 됩니다.
그래서 자료 수집이 복잡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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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시티 작전이란게, 국내건 국외건 아는 사람도 얼마 없고...
한마디로 참 안습한 작전이라 쓰는 데 별 시간도 안 걸렸습니다.
자료 수집은 오래 걸리기보단 쓰기 번거로울 정도로 짤막하고 갑갑(?)한 이유로써;ㅅ;

위의 이유는 이번 5편의 제목이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묻혀버린 마지막 무대 ㄷㄷㄷ

이제 이걸로써 미국이 관여된 유럽전선의 작전은 사실상 막을 내립니다.

...랄까, 3편에서 다룬 내용은 미국이 저지른 짓이 아니라 도이칠란트가 저지른 짓이군요.
제 착오였습니다. 원래는 미국이 1944년 06월 06일부터 유럽전선에서 저지른 작전을 다루려고 했습니다만;;;
증말 다룰 내용 없네요;;;
그래서 어차피 더 다룰 작전도 없고 해서 1944년 06월 06일부터 유럽전선에서 미군이 꼽사리 꼈던 모든 작전들을 다뤄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러면 6편부터는 좀 길어지겠는데요.
작전 한두개씩 같이 써 놓을지도 모르겠구요...


작전명 밀덕의 혼

2009년 10월 5일 월요일

경문고등학교의 괴담 두 가지

1. 경문고등학교의 도서실

제가 다니는 학교, 경문고등학교는 작년 도서관을 신축했습니다.
그리고 그 이전에는 도서관이 없었습니다.

<구글 어스에서 보면 그 과거 모습이 보입니다.
2006년 01월 28일, 고도 428M>

<신축한 도서실, 원래 학교 건물하고 지독히도 안 어울리는 디자인입니다;ㅅ;
참고로 이 사진은 학교 교재에서 발췌한 사진입니다.>

아니, 그저 당시에는 경문고등학교 도서실의 탈을 쓴 그저 서고실이 있었을 뿐입니다.

서고실에는 아무도 볼 리 없는 교육법령집과 학교 개교 초기 중요 문서를 보관하는 곳이라 학생들은 함부로 들어갈 수 없는 곳입니다.
그래서 언제나 먼지가 쌓여 있기 마련입니다.

작년 여기에서 보관하던 교육법령집을 신축한 도서실로 옮겨야 해서 서고실에 들어가야 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문을 잠궈 두는 자물쇠가 녹슬어버린데다 열쇠마저 분실하여서 창문으로 들어갈 수도 없고 하여서 그냥 대걸레로 자물쇠를 부수고 들어갔습니다.

들어가 보니 영화에서나 볼 법한 먼지와 거미줄이 잔뜩 쳐진 책으로 가득 들어찬 다락방 수준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런데 참 이상한 것은...

정규 도서관이 없던 시절, 분명히 도서부가 존재했습니다.
그리고 그 도서부는 분명히 서류상으로도, 선생님들도 도서부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분명히 소속된 부원도 있었으며 매 축제 때에도 도서실에서 행사를 진행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경문고등학교에는 도서실이 없었으며 경문고 학생 중 도서부 소속 학생이 없습니다.

도서부는 학생, 선생님들의 의식 속에서 분명히 존재했으며
서류상으로도 분명히 존재했고, 지도 교사와 소속 학생도 있었으며 축제 행사도 멀쩡히 진행했습니다.
심지어 학교 행사 예산 편성도 멀쩡히 받았습니다.

하지만 학교 동문회 홈페이지에서는 아무도 도서부원이 아니었습니다.
도서부가 존재하냐는 질문에는 분명히 존재했다고, 분명히 축제 중 포스터를 붙여 놓은 광경도 보았고...

분명히 존재하는 것이라는 모든 근거에도 불구하고 서류상의 도서부원들과 선생님은 존재했으며 또한 그 활동도 멀쩡히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작년, 새로 도서실이 건축되며 도서부가 재창설되어 지금의 괴담은 사라지는가 했습니다.

그렇지만 저번주 토요일, 학교 운동장 조회를 기회로 할 일도 없고 교무실에 선생님들도 없고(;;;) 해서 1,2,3학년 학생들의 모의고사 등급컷을 본 적이 있었는데 모두 1253명이었습니다.

그리고 당일날 모의고사를 못/안 본 학생은 모두 43명.
이들은 고3 35명-직업반, 결석자, 신종플루 확진자 3인 포함-, 고2 5명-결석자, 신종플루 의심환자 포함-, 고1 3명-전원 결석자-입니다.

그러면 전원 1296명입니다.
그런데 실제 학생들의 수는 1284명입니다.

그리고 교장, 교감선생님을 제외한 선생님들의 서류상 수는 72명-기간제 비정규직교사 3명, 원어민교사 5명 포함-입니다.
행정실에서 이면지로 나온 급여 지급 명세서를 살펴 본 결과 분명히 72명입니다.
그런데 실제 선생님들은 모두 71명입니다!

이 항목은 제가 실제로 접한 후, 일련의 조사 과정 결과 전후 사정이 모두 실제임을 확인한 내용입니다.

다만, 이 모든 과정을 확인한 결과 이 상황이 단순한 행정 착오,
즉, 그저 서류상으로 인한 실수로 이런 괴담이 유래된 것이다라는 것을 확인하여
지금은 행정 착오에 근거한 괴상(?)한 괴담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저 모의고사 응시자수는 어찌 된 것인가...
좀 더 자세히 확인한 결과 서울시에는 OMR 마킹 하나 제대로 못 하는 고 2가 22명 그 이상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선생님 숫자는 어떻게 된 것일까요?
이번 년도에 퇴직한 선생님이 급여 지금 명세서에 멀쩡히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흠좀무;ㅅ;

하지만, '도서실 신축 이전의 도서부'에 해당하는 내용은 사실로 검증되었습니다.
학교 기간인력학생(?)인 신호등도 당시 도서부원 기록에는 접근할 수 없었습니다;;;

2. 미술실의 빨간색 잉크

경문고등학교 미술실에는 언제 구입했는지 모를 약 4L 가량의 빨간색 잉크가 있습니다.
엄청 큰 용량이죠...
선생님 말로도 이게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르고,
버려도 어느 학생이 계속 들고 와서 그냥 계속 놔 둔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잉크는 대체 무슨 재료를 사용했는지,
이걸 가져다 펜 촉으로 그림을 그린 적이 있는데
일반적인 검정 잉크보다 훨씬 이물질이 많이 끼었습니다.
게다가 그 산물로 나온 작품도 조금 빳빳해지고 심지어 두껍게 그린 부분은 바싹 마르고 나니 부서지기까지 합니다.

게다가 잉크를 흘리고 그냥 방치하니 칙칙한 갈색이 되었습니다.

갈색 락카보다 좀 더 짙은 색이라 이건 갈색 락카를 액화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만 갈색 락카는 핏빛이 아주 살짝 도는 진한 갈색이고, 말라도 핏빛이 살짝 가시는 물건인데다 이렇게 확연한 변화를 가지는 물건이 아니거든요.

그런데 무엇보다, 이 잉크가 덩이지는 현상이 발생한 적이 있었습니다.
마치 붉은 젤리처럼 변했더군요. 게다가 결코 좋지 못한 냄새까지 났습니다.
그리고 이걸 조사하려고 표본을 채취하려고 하니 감쪽같이 없어졌습니다.
그리고 미술실에는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 온 흔적이 있었습니다.
게다가 이걸로 만든 작품까지 모두 사라졌습니다.

대체 이 잉크의 재료는 무엇일까요.

-이 내용은 비정상적인 경로로 유통되던 괴담입니다.
실제 괴담인지, 타 학교에서 유래되던 괴담이 모종의 이유로 흘러든 것인지,
그저 경문고등학교 한 곳에서만 존재하는 괴담인지는 확인할 도리가 없습니다.
즉, 이건 경문고등학교에서 유래된 괴담인지도 알 수 없다는 이야기죠;;;
다만, 이런 괴담이 있다는 것을 알아 두고 싶어 추가했습니다.

2009년 10월 3일 토요일

004. 1944. 09. 17. Fight for Our Conceit

-003. 1944. 12. 16. His last resistance에 이어서 연재합니다.-

3편에서 예고한 바와 같이 이번에는 마켓-가든 작전입니다.
마켓가든 작전이 아니라 마켓-가든 작전입니다. 왜 마켓-가든 작전인지는 잠시 후 설명하겠습니다.

이 마켓-가든 작전이란...
여러모로 영국군 이하 여러 연합국이 너무 자만했던 바, 결국 08%의 성공을 거둔 작전입니다.

-왜 08%냐 하면... 본 작전이 종결되고 연합국 수뇌부가 말하기를, '본 작전은 80%의 성공을 거두었다'고 했는데 80%는 개뿔-ㅅ- -

간단히 비교를 하자면 후일 베트남 전쟁의 예고편을 찍었다고 하면 편하다고 봐야 할 까요.
애시당초 그 쪽은 참 무익한 이념싸움이라 딱히 비교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합니다만, 그래도 왠지 양상이 비스무리하여 비교를 해 보려고 해도 딱히 비교를 할 기분이 들지를 않는군요.

그때는 60년대고 다루려는 내용은 40년대니까[...]

여하튼, 시작합니다.

연합군의 파리 점령 이후, 유럽 서부전선은 사실상 광란의 진격의 대명사, 패튼 장군과 그의 강력한 라이벌 몽고메리 장군의 빠와로 인하여 거진 도이칠란트 쪽으로 이동했습니다. 팔레즈 포위망에서 괴멸적인 타격을 입은 서부 전선의 도이칠란트군은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원수를 다시 서부 전선 도이칠란트군 지휘관으로 재사용하는 등 필사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전선은 결국 네덜란드까지 물러난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연합군의 진격이 멈췄습니다?

그 이유라 함은...

<출처는 여기. 줄줄줄줄 쓰기 귀차나요;ㅅ;>

이전에도 몇 차례를 이야기 한 바 있는 보급 문제입니다.
특히 완전 공업화 된 미국 쇼미더머니의 포스 아닌 포스로 100% 차량화 되다시피 한 연합군에게는 더더욱 그랬습니다.

그나마 좀 남아 있던 북프랑스의 항구들은 철수하는 도이칠란트군이 철저하게 파괴 공작을 벌이는 바람에 당장 쓸 수 없는 상황이었고, 유일한 항구는 노르망디 해안[...]뿐이었습니다.
그리고 패튼장군 특유의 진격교리, 즉 자신의 기갑부대는 광란의 질주를 벌이지만 중간에 귀찮은 도이칠란트 군의 점령지가 등장하면 후속 보병부대에게 포위섬멸 임무를 하달하고 또다시 광란의 질주[...]

이 뿐만 아니라 유럽 대륙 내의 수송망의 상황도 안습일로를 달리고 있었습니다.
가장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던 프랑스의 철도망은 4년 간의 도이칠란트 점령 기간 중 프랑스 레지스탕스의 파괴공작을 필두로 하는 교통망 파괴작전+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위한 연합군 공군의 후방 차단 작전+철수하는 도이칠란트의 파괴 공작으로 이게 철도였는지 그냥 쇠막대기 두 개 놓고 그 아래에 나무판자 많이 깔아 놓은 것인지 분간이 안 가게 되었습니다.

결국 노르망디 해안의 후방 보급대부터 최전방 부대까지 사실상 모든 보급은 '레드볼 익스프레스'라 불리우는, 흑인 운전병의 특별 보급대에 의존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최전방 부대-역시 패튼과 몽고메리네. 여기에 꼽사리 낀 미국 브래들리네 부대까지 OTL-가 점점 노르망디 해안에서 멀어지는 바람에 수송대 자체가 소비하는 연료만도 감당할 게 못되어 가서-한 마디로, 배송료가 너무 비싸서- 결국 진격이 멈췄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사실은 당시 도이칠란트 군은 꼬리 말고 도망치기 바빠서 반격할 여유가 없었던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랄까요.
만약 히틀러가 꿈을 좀만 더 일찍 꿨더라면 정말 히틀러가 꿈 꾼 대로 될 뻔했습니다.

그리고 결국 싸움도 없고 심심한 연합군 수뇌부에서는 밥그릇 싸움이 일어나기 전의 상황이 되었습니다.
보급 우선 순위를 놓고 미국과 영국의 지상군 지휘관들 사이에서 갈등과 반목이...
북아프리카에서부터 보인 양군 지휘관들의 경쟁과 알력은 이 시기에 보급 문제를 둘러싸고 폭발 일보 직전까지 치닫았습니다.

한 편, 프랑스에서 도이칠란트군의 급격한 후퇴와 괴멸은 연합군 수뇌부를 들뜨게 했습니다.
심지어 이제 잔존한 도이칠란트군 전력은 자전거만 가진 소년병과 늙은 병사들 뿐이라는 낙관적인 추정까지 나왔습니다.
오죽하면 1944년 12월 25일을 각 병사의 집에서 보낼 수 있을 것이라는 말까지 나왔으니 말 다 했습니다.

게다가 이렇게 도이칠란트군이 안습해 할 때 몰아붙이면 쉽게 전쟁을 끝낼 수 있을 것이라는 낙관적 전망이 연합군 수뇌부의 전반적인 생각이었습니다.
그리고 노르망디 상륙 작전 이후 후방에서 휴식과 재편성 등 재정비 작업만 해온 공수부대 전력-이라기보단 간지폭풍 대량공수대낮에 보고 싶어서?-을  활용하고 싶어하는 지휘관들의 소망도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영국군 버나드 몽고메리 원수가 이 작전을 계획했습니다.

그런데 이 작전의 기획자가 지구방위대 미군의 아이젠하워가 아니라 영국군 몽고메리입니다?

왜 그런고 하니...
지금 영국군 상황은 별 공적도 세우지 못 한 참 안습한 부대의 전형으로,
작전명 오버로드 당시 캉 지구에서 무려 2주간 지지부진하다 미군이 도우러 오자 그제서야 점령에 성공한 가슴아픈 과거(?)를 가지고 있었던 것도 있고 제시한 바와 같이 정말 공적 하나 없이 지지부진한 자기 공훈 좀 세우려고영국군 사기를 좀 올려 주고 싶어서 이 작전을 기획했다는 성격이 큽니다.

마켓-가든 작전 계획

바다보다 낮은 네덜란드에는 라인 강이 흐르고 이 라인 강을 비롯한 뫼즈 강, 발 강에는 7개의 다리가 있습니다. 연합군의 계획은 바로 이 7개의 다리에 공수부대 병력을 투입, 다리를 점거한 후,
지상군이 투입되어 네덜란드의 제방을 지나 네덜란드 방어선과 라인 강을 돌파해 바로 도이칠란트 본토로 진입한다는 작전입니다
만약 이 작전이 성공한다면 크리스마스 전까진 전쟁을 끝낼 수 있을 거라는 것이 연합군의 계산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작전은 2개의 작전으로 구성되었습니다.

마켓, MARKET
1 연합공수군은 브라우닝 장군의 지휘를 받아 가든 작전이 개시되기 전까지 다리와 핵심 지역을 장악한다.

미국 101 공수사단 - 아인트호벤
미국 82 공수사단 - 니이메헨
영국 1 공수사단 - 아른헴
자유 폴란드 공수여단 - 약 1천명 가량의 지원부대

가든, GARDEN

영국 2 군의 지상군은 브라이언 호록스 장군의 영국 30군단을 내세워 마켓의 결과로 확보한 진격로를 따라 북쪽으로 진격.

연합군은 이 부대들로 3일 이내로 라인 강을 모두 확보, 돌파해야 하며 이 작전의 성공을 위해 공수부대가 투입될 지역엔 도이칠란트군 기갑부대가 없어야 한다는 전제 조건이 필요했습니다.
왜냐, 공수부대의 대전차장비란
대전차총, 박격포, 바주카포, 대전차수류탄, 지뢰, 소구경의 야포, 육탄 수류탄 돌진[...]과 같은
지국히 한정된 물건밖에 없으니까.

-탱크를 잡는데에는 탱크가 필요하지만 공수부대에게는 그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 작전은 9월 17일, 일요일 대낮에 개시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작전 시작!

드디어 1944년 9월 17일 일요일 오전, 병력 3만 5천여 명, 340문의 휴대용 야포 및 화포, 500여 대 가량의 각종 지프 및 소형 차량과 기타 장비, 해서 600여 톤 규모의 물자를 적재한 수송기와 글라이더가 영국 각지의 비행장에서 이륙하는 것으로 영국군 주도의 장대한 삽질크리는 막을 올립니다.

일단 1차로 시작되는 작전인 공수점령작전, 마켓의 규모로는 해안 후방 지대에 강하하는 작전명 오버로드보다 훨씬 규모가 큰 작전입니다. 아무래도 네덜란드 전 역에 걸쳐 강하하는 것이니 말 다 했죠 뭐.

그러나 작전 초기, 수송기의 고장 등으로 일부 기체가 영국, 또는 인근 연합군 비행장으로 복귀했습니다. 게다가 대낮에 강하를 했으니 도이칠란트 대공포대에게 좋ㅋ은ㅋ표ㅋ적ㅋ이 되었으며, 기타 날다가도 지들끼리 부딪혀 요단강 너머로 날아가거나 등등등[...]

여튼간 오후 2시 15분, 벨기에 - 네덜란드 국경선에서 대기 중이던 영국 30군단이 네덜란드로 진격을 개시했습니다.
그리고 지상군 또한 작전 초부터 도이칠란트군의 대전차포 공격에 발이 묶였습니다.
아무래도 네덜란드의 길이란 서울특별시 강남구 압구정동 8차선도로 같은 것이 아니라 한강변 자전거 4차선도로(...뭐지 이 비유는?) 같은, 그야말로 산 속 오솔길이 대부분이라 맨 앞을 가던 탱크 한 대만 때려 잡아도 바로 길이 막혀 버리기 십상입니다.
그런데 이런 거 생각 안 하고 근 5만명 가량을 때려 박으니 그 결과는 불 보듯 뻔하죠[...]

하여간 먼저 아인트호벤에 미국 101 공수사단이 강하합니다.
역시 미 육군 최초로 최고의 부대기장을 수여받은 부대답게 이들은 다리 하나를 점령하는 데 성공하지만 간발의 차이로 점령해야 했던 다리 하나를 도이칠란트군이 눈앞에서 요단강 너머로 날려 보내는 것을 보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현재 전 세계에서 유일하다시피 남아 있는 최고의 낙하산 강하부대인 미국 82 공수사단이 니이메헨에 강하합니다.
하지만 이들이 다리를 점령하기도 전에 도이칠란트군이 선수를 쳐 다리를 장악합니다.
결국 발 강의 다리를 두고 전선이 형성되었습니다.

한 편, 아른헴에 투입된 영국 제1 공수사단의 경우는 매우 심각했습니다.
이들이 강하한 아른헴 주변엔 연합군이 그 존재를 애써 무시하고 있던 도이칠란트 기갑사단이 배치되어 있어서 순식간에 전장의 폭풍에 휩쓸렸습니다.
그러나 이 기갑사단에 방법당했다는 것은 영국이 패배를 감추기 위한 핑계일 뿐이었으며, 실제 기갑사단들은 1개 보병사단만도 못한 전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작전 초반, 이들을 외부와 연결해 줄 통신트럭 두 대가 감쪽같이 증발하면서 이들은 순수히 자신들의 능력만으로 이 곳에서 살아 가야 할 상황에 처하고 맙니다.

이건 여담입니다만, 이 실종된 두 대의 통신차량은 정말로 말이 많습니다.
실종된 원인이 몇 가지 있습니다만, 가장 대표적인 것을 들자면

1. 글라이더로 강하하다 숲속에 추락해 아무도 살아나가지 못했고 아직까지 그들의 시신을 발견하지 못했다
2. 글라이더째로 늪지대에 쳐박았다, 물론 아무도 살아나가지 못했다.
3. 현지 주민들에게 트럭 부속품까지 소멸당했다
4. 트럭 운용병들이 쓱싹 해 먹고 날랐다

2차대전 중 가장 대표적인 미스테리로 손꼽히는 미스테리입니다.
다른 미스테리는...음...몰라요 저도[...]

하여간 이 지역에 주둔하고 있던 기갑사단은 9 SS기갑사단 호헨슈타우펜과 10 SS기갑사단 프룬츠베르크인데 이 중 9 SS기갑사단은 쓸만한 전력은 모두 프룬츠베르크에 넘겨주고 도이칠란트 본토로 이동하여 재편성 예정이라 주력인 19, 20 SS 기갑척탄병 연대는 합쳐서 2개 중대에 불과했습니다.
또 사단 포병 연대는 야포가 없어서[...] 그냥 보병으로 싸웠고, 기갑 전력도 판터 3대와 4호 구축전차-전차 잡는데 쓰는 전차랄 것도 없는 잡것?-2대가 전부였으며 예하 공병대대, 대공포대대 등도 말이 대대지 실은 한 개 중대급도 안되었습니다.

그나마 조금 사정이 나았던 9 SS 기갑수색대대는 마켓가든 작전 당일 도이칠란트로 향하는 화차에 적재되고 있었고 결국 다 합해봐야 사단 총원은 3천 명 이하로서 기갑사단은커녕 연대 전투단 수준이었습니다.
역시 10 SS 기갑사단도 9 SS 기갑사단의 인력과 장비를 넘겨받았지만 워낙 프랑스에서 포위-퇴각전 중에 큰 피해를 입어 축소된 편제에도 한참 부족했고, 그나마 괜찮은 전력이던 하인케 전투단, KG Heinke은 아헨-후일 결국 연합군이 최초로 진입한 도이칠란트 본토-의 위기가 급하다고 차출된 상태라 재정비가 시급한 보병 사단 수준도 되지 않았습니다.

다만, 존 프로스트 중령이 지휘하는 제2대대가 아른헴 대교의 입구를 장악하면서 도이칠란트군의 추가 투입을 방해했지만, 도이칠란트군이 주변에서 투입 가능한 모든 전투 병력을 다급히 투입하고 사단 주력은 다리에 접근하지도 못한 채 마구잡이로 싸우는 상황에서 아른헴 다리 입구 장악은 그다지 의미가 없었습니다.

결국 9월 18일 오후, 작전 예정 시간보다 24시간을 초과한 상태에서 영국 30군단이 아인트호벤에 도달합니다. 그러나 전날 미국 101 공수사단이 장악하지 못하고 폭파당한 다리가 복구되지 못했기 때문에 다시 후방에서 가교를 들고 와야 해서 많은 시간을 허비했습니다.
여기에 다시 네이메헌까지 진격하는 데 도이칠란트군의 대전차 공격으로 다시 많은 시간을 허비합니다.
결국 영국 30군단은 예정 시간보다 70시간을 초과해 9월 19일, 니이메헨에 도달합니다.

그러나 다리는 아직까지 도이칠란트군이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9월 18일, 아른헴 대교 입구를 방어하고 있던 프로스트 중령의 2대대는 도이칠란트 10 SS 기갑사단의 공격을 받고 있었습니다.
장갑차를 앞세우며 공격해 오는 도이칠란트군은 사단 예하 기갑수색대대인 그로텍 전투단이었고, 영국군은 피아트 대전차 로켓포를 쏘아대며 대항합니다. 결국 장갑차가 격파되면서 다리를 막아 도이칠란트군은 더 이상의 장갑차량을 다리 건너로 보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른험 시내에서는 영국 1 공수사단의 주력 부대가 혼전 상황에 빠졌고, 이에 따라 사단과 대대 간의 통신은 거의 두절 상태가 되고 있었습니다.

9월 19일, 아른헴 대교 반대편의 도이칠란트군은 영국군이 더 이상 항복할 것 같지 않자 영국군이 엄폐해 있을 것 같은 민가에 대해 무차별 포격을 퍼붓습니다. 이 포격에 영국군 대대 병력이 괴멸적인 타격을 입음으로써 더이상 영국군은 사실상 모든 전투력을 날려먹습니다.
그러나 전날 다리 한가운데에서 파괴된 장갑차로 인해 도이칠란트군은 다리 건너로 병력을 추진할 수 없었습니다.

이제 신속히 30군단이 도착하지 않는다면, 영국 1 공수사단은 결국 괴멸되고 말 것입니다!

9월 19일, 네이메헌의 30군단은 다리를 돌파할 방법을 모색하나 마땅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결국 미국 82 공수사단이 강을 우회하여 후방에서 끌고 온 보트로 강을 도하, 다시 교량쪽으로 이동해 다리를 점거한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9월 20일, 미국 82 공수사단은 보트를 지원받았지만 그 수량이 매우 적었고 예정했던 시간보다 너무 늦었습니다.
그러나 공수부대원들은 이런 상황에서 포기하지 않고 강을 건너고자 하여, 오후 3시에 도하를 개시, 도이칠란트군의 탄막으로 인해 많은 장병들이 물 속으로 사라져 갑니다.
그리고 도하가 시작된 지 얼마 안되어 강 반대편으로 병사들이 상륙에 성공해 다리를 점거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미 예정 시간을 훨씬 뛰어 넘었기 때문에 작전은 이 시점에서 실패한 것이나 다름 없게 되었습니다.

결국 9월 20일 저녁, 마침내 아른헴 대교에서 프로스트 중령의 2대대가 와해되어 아른헴 대교에서 퇴각하게 됩니다.
이와 동시에 영국 1 공수사단도 철수를 개시해 9월 21일엔 아른험을 떠나 오스테르베이크로 퇴각합니다.
이 날, 스타니슬라프 소사보브스키 장군의 자유 폴란드 공수여단이 영국 공수부대를 지원하기 위해 아른헴 지구에 투입됩니다.
하지만 이들의 세력은 워낙 미미해 곧장 영국군과 같은 처지에 놓이게 됩니다.
게다가 영국군의 세력은 너무 작았기 때문에 공중에서 투하하는 보급품의 대다수가 도이칠란트군 영내로 떨어졌습니다.
한편, 발 강을 도하하는 데 성공한 영국 30군단은 계속되는 도이칠란트군의 방해에 부딪혀 결국 아른헴에서 수십 Km 밖에 떨어지지 않은 제방길에서 진격 한계점에 도달합니다. 전투력이나 그 모든 것을 다 갖추고 잇었음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진격이 불가능했습니다.

이것은 단 한 문장으로 설명이 가능합니다.

전공에 눈이 먼 수뇌부의 오판을 아무 잘못 없는 병사들이 대신 치루었다

결국 9월 25일, 영국 1 공수사단과 자유 폴란드 여단은 새벽 6시를 기해 모든 진지를 포기하고 라인 강 너머로 퇴각합니다.
각종 중화기를 비롯해 신속한 이동이 불가능한 부상병들이 유기된 채 생존한 병사들은 죽을 고비를 넘기며 간신히 사지에서 탈출하는 데 성공하게 됩니다.

이로써 마켓-가든 작전이 종료됩니다.

얼마 뒤, 영국군 사령관 몽고메리가 80% 이상의 목적을 달성했다고 선전했지만 실제로 얻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다만 이 작전을 진행하지 않았더라면 정말로 전쟁이 1944년 12월 즈음에 임박하여 끝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17,000명의 젊은 목숨들만이 희생되었으며, 더더욱 영국 1 공수사단은 단지 2,163명 만이 간신히 살아서 돌아오는, 사실상 전멸이나 다름 없는 피해를 입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작전은 그간 전장의 최전선에서 싸워 오던 연합군 공수부대에게 큰 피해를 안겨 주었습니다.
작전이 개시된 후, 중장비를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이 보병 부대들은 그저 거점 방어에 남겨졌습니다.
그리고 이 작전이 끝난 후, 유럽전선은 결국 사실상의 소강상태에 이르었고, 히틀러가 꿈을 꾸지 않았다면 이 전쟁이 1946년까지 계속 이어질 빌미를 마련한, 여러모로 참 말이 많은 작전이었습니다.

여담이지만 이 작전에서 거진 박살난 영국 1공수사단의 이름은 붉은 악마입니다.
그래서 아른헴을 붉은 악마들의 무덤이라고 하는데 그 뉘앙스가 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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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전은 이후에도 자만하면 어떻게 되는가를 결정적으로 입증해 주는 상징과도 같은 작전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러 전쟁에서 여러 수뇌부는 이와 같은 우를 계속 범하였고, 사람은 곧 망각의 동물이라는 것을 결정적으로 밝혀 준 결과가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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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5편으로는...
미국이 2차대전 동안 유럽에서 참여했던 마지막 전투인 작전명 버시티를 다루겠습니다.


작전명 밀덕의 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