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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0월 25일 일요일

005. 1945. 03. 24. Buried last stage

-004. 1944. 09. 17. Fight for Our Conceit에 이어서 연재합니다.-

4편에서 예고한 바와 같이 이번에는 2차대전 기간 동안 미국이 유럽전선에서 마지막으로 참가한 전투인 작전명 버시티를 다루겠습니다.
여하튼,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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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12월, 연합군은 히틀러의 꿈을 위시한 도이칠란트군의 대규모 반격을 이를 막아내고 1945년 03월 경, 라인강 서부를 정리합니다. 이 와중에 버나드 몽고메리 장군의 영국 제21집단군은 3월 9일자로 라인강 도하를 위한 작전-작전명 플런더-Operation Plunder- -을 시행합니다.

당시 라인강 서부에서 도이칠란트 본토침공을 위해 대기하던 연합군 병력은 영국군 11개 사단, 6개 독립여단, 캐나다군 8개 사단, 미군 11개 사단. 대략 128만명이군요.
이거 말이 128만명이지 현대 한국군 평시 정규 병력이 약 60만여명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자면...ㄷㄷㄷ
게다가 도하 지원을 위해 대기중이던 공병의 숫자만 5만 9천 명이던 판이었습니다. 여기에다가 보급량도 실로 엄청납니다. 그냥 영국, 미국군 각 군 보급품 숫자만 살펴 봐도...
영국 제2군 11만 8천톤, 미군 제9군 13만 8천톤[...]

여튼 이런 건 제쳐둡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도이칠란트가 불쌍해집니다 ㅠ

여튼간, 연합군 수뇌부는 라인강 도하에 앞서 이 작전의 성공을 확신하기 위해서 공수부대의 투입을 결정합니다. 당시 대기중에선 투입선상에 오른 공수사단 중 영국군 1공수사단은 마켓-가든 작전에서 엄청난 피해를 입어 작전투입은 불가능합니다.
그리하여, 작전명 오버로드 이후 늘 최전선에서 활약하던 두 공수사단, 미군 82, 101공수사단과 신참사단 13, 17공수사단, 영국군 6공수사단이 물망에 올랐습니다.
그리고 이들에게 작전이 하달됩니다.
그 이름하며 작전명 버시티-Operation Varsity-, 그리고 이들의 임무는 이렇습니다.
라인강 동부 루르 공업지대+a를 타격하기 위해 라인강을 도하하는 연합군 병력들에게 도이칠란트 B집단군이 시선을 끌지 못 하도록 양동작전을 펼치는 동시, 교두보를 장악한다.

하지만 이렇게 많은 병력이 뛰어내리면서-총 21680명- 마켓-가든 작전에서 붉은 악마들을 날려 버린 경험이 있던 연합군 수뇌부는 이들의 작전을 도하하는 부대의 규모에 걸맞지 않게 축소시킵니다.
즉, 도하에 앞선 교두보 확보가 아니라 그저 양동작전으로 축소됩니다.

사실 3월 24일, 연합군의 도하에 앞서 당일 오전 10시에 강 동부에 3개 사단이 통째로 쏟아져 내릴 계획을 세웠지만 연합군의 상징이던 물량이 드디어 달리기 시작...은 아니고 수송기가 모자라서 2개 사단으로 축소됩니다.

사실 이 2개 사단으로 18공수군단, 역전의 용사(?)들인 미 82, 101공수사단을 쓰려고 했으나 이들은 후에 있을지 모르는 베를린 강하작전을 위하여 남겨 두고 영국 6공수사단과 미 17공수사단이 지명됩니다.

그리고 공수부대로 새로 개편된 미 17 공수사단을 시험해 볼 필요도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이 작전에 투입된 대략적인 항공기의 수는...
수송기 1600여대, 글라이더 1300여대, 호위 전투기 889대, 보급강하용 폭격기 240대, 지원 전투기 2100여대, 지원 폭격기 821대[...]
아니 수송기 모자랐다며[...]
워낙 압도적인 화력으로 도이칠란트군을 데꿀멍시켜버리는 바람에 처칠과 아이젠하워까지 와서 이 작전을 지켜보았습니다. 오죽 전선이 안전(!)했으면...

드디어 확실히 결정된 이 작전의 형태는 아래와 같습니다.

기본 개요-연합군 도하병력의 루르 공업지대 타격을 위한 양동작전(?)

전개(?)-패튼장군이 라인강을 도하하여 본격적으로 도이칠란트 본토를 타격하기 전, 먼저 루르 공업지대를 방위하는, 한 마디로 라인강을 도하하자마자 마주칠 적 부대인 도이칠란트 B집단군의 시선을 끌 무언가가 필요했다. 그리고 그 시선을 끌 무언가가 바로 작전명 버시티로 투입될 공수부대.


그래서, 여튼간, 하여간, 어찌 되었던 강하는 시작됬습니다.

미 17 공수사단 507공수보병연대가 도이칠란트 베젤(Wessel)시에 강하해 이 주변에 포진해있던 도이칠란트 84보병사단과 접전을 벌였습니다. 하지만 해당 사단이 그간 엄청난 압박을 당하던 터라 제대로 전투도 하지 못하고 결국 박살나고 길을 내 줍니다. 동 사단 193글라이더보병연대의 강하율이 무려 90퍼센트에 이를 정도로 17사단의 작전은 완벽한 편이었습니다.

일단은 그렇게 보였습니다.

하지만 동 사단 513공수보병연대와 영국 6공수사단은 예상보다 극심한 대공포화에 밀려 서둘러 강하를 하는 바람에 영 좋지 않은 곳에 강하를 했으나 마켓-가든때와는 달리 거침없이 해당 목표로 달려가 도이칠란트군을 제압합니다. 아무래도 작전범위가 좁아-이들이 떨어진 곳이 바로 루르 공업지대- 도보로도 기동에 큰 문제가 없었던 탓이지요. 게다가 여기 부대 상태가 영...

이건 뒤에서 설명하겠습니다.

어쨌든 이런 식으로 도이칠란트 B집단군이 제압되면서 연합군은 안정적인 도하를 마칩니다.
하지만 연합군 수뇌부는 이렇게 간결한 작전에 이렇게 대규모의 공수작전을 펼칠 이유가 있었냐는 회의론자들을 마주합니다.

하지만 이들은 무시당합니다.

회의론자들이 나타난 이유는 작전 첫 날 공수부대에게 잡힌 도이칠란트군 포로가 3천여명이 이를 정도로 압도적인 전투였습니다.

하지만 강하 도중의 피해가...
땅도 디뎌 보기 전에 무려 1735명이 사망하고 6600명이 부상당하는 예상치 못한 결과를 낳았습니다.
하지만 B집단군의 시선을 끄는 데 성공, 패튼 장군이 도하하여 루르 공업지대를 공격, 마지막 남은 도이칠란트의 전투수행능력을 앗아가 같은 해 5월, 도이칠란트의 항복을 불러왔습니다.

 

사실 이 버시티 작전이...피해가 상당히 막심한 편입니다.
당시 루르 공업지대의 방어를 하던 도이칠란트 B집단군은 이제 전투력이라고는 0이던 도이칠란트가 급하게 급조한 소방대입니다.
히틀러 유겐트에 공군 정비병에 노무자에 러시아 포로에 온갖 허섭스레기가 다 동원된 병력인지라.
그리고 이 패배로, B집단군을 지휘하던 도이칠란트군의 소방수 모델 원수는 숲에 들어가 권총자살했습니다.

어찌되었든 연합군은 5일만에 도하를 마쳤고, 버시티 작전도 2일만에 완벽하게 종료됩니다. 이 작전은 훗날에도 떡밥을 던져도 뭥미? 하는 작전이 됩니다.
그래서 자료 수집이 복잡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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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시티 작전이란게, 국내건 국외건 아는 사람도 얼마 없고...
한마디로 참 안습한 작전이라 쓰는 데 별 시간도 안 걸렸습니다.
자료 수집은 오래 걸리기보단 쓰기 번거로울 정도로 짤막하고 갑갑(?)한 이유로써;ㅅ;

위의 이유는 이번 5편의 제목이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묻혀버린 마지막 무대 ㄷㄷㄷ

이제 이걸로써 미국이 관여된 유럽전선의 작전은 사실상 막을 내립니다.

...랄까, 3편에서 다룬 내용은 미국이 저지른 짓이 아니라 도이칠란트가 저지른 짓이군요.
제 착오였습니다. 원래는 미국이 1944년 06월 06일부터 유럽전선에서 저지른 작전을 다루려고 했습니다만;;;
증말 다룰 내용 없네요;;;
그래서 어차피 더 다룰 작전도 없고 해서 1944년 06월 06일부터 유럽전선에서 미군이 꼽사리 꼈던 모든 작전들을 다뤄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러면 6편부터는 좀 길어지겠는데요.
작전 한두개씩 같이 써 놓을지도 모르겠구요...


작전명 밀덕의 혼

2009년 10월 3일 토요일

004. 1944. 09. 17. Fight for Our Conceit

-003. 1944. 12. 16. His last resistance에 이어서 연재합니다.-

3편에서 예고한 바와 같이 이번에는 마켓-가든 작전입니다.
마켓가든 작전이 아니라 마켓-가든 작전입니다. 왜 마켓-가든 작전인지는 잠시 후 설명하겠습니다.

이 마켓-가든 작전이란...
여러모로 영국군 이하 여러 연합국이 너무 자만했던 바, 결국 08%의 성공을 거둔 작전입니다.

-왜 08%냐 하면... 본 작전이 종결되고 연합국 수뇌부가 말하기를, '본 작전은 80%의 성공을 거두었다'고 했는데 80%는 개뿔-ㅅ- -

간단히 비교를 하자면 후일 베트남 전쟁의 예고편을 찍었다고 하면 편하다고 봐야 할 까요.
애시당초 그 쪽은 참 무익한 이념싸움이라 딱히 비교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합니다만, 그래도 왠지 양상이 비스무리하여 비교를 해 보려고 해도 딱히 비교를 할 기분이 들지를 않는군요.

그때는 60년대고 다루려는 내용은 40년대니까[...]

여하튼, 시작합니다.

연합군의 파리 점령 이후, 유럽 서부전선은 사실상 광란의 진격의 대명사, 패튼 장군과 그의 강력한 라이벌 몽고메리 장군의 빠와로 인하여 거진 도이칠란트 쪽으로 이동했습니다. 팔레즈 포위망에서 괴멸적인 타격을 입은 서부 전선의 도이칠란트군은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원수를 다시 서부 전선 도이칠란트군 지휘관으로 재사용하는 등 필사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전선은 결국 네덜란드까지 물러난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연합군의 진격이 멈췄습니다?

그 이유라 함은...

<출처는 여기. 줄줄줄줄 쓰기 귀차나요;ㅅ;>

이전에도 몇 차례를 이야기 한 바 있는 보급 문제입니다.
특히 완전 공업화 된 미국 쇼미더머니의 포스 아닌 포스로 100% 차량화 되다시피 한 연합군에게는 더더욱 그랬습니다.

그나마 좀 남아 있던 북프랑스의 항구들은 철수하는 도이칠란트군이 철저하게 파괴 공작을 벌이는 바람에 당장 쓸 수 없는 상황이었고, 유일한 항구는 노르망디 해안[...]뿐이었습니다.
그리고 패튼장군 특유의 진격교리, 즉 자신의 기갑부대는 광란의 질주를 벌이지만 중간에 귀찮은 도이칠란트 군의 점령지가 등장하면 후속 보병부대에게 포위섬멸 임무를 하달하고 또다시 광란의 질주[...]

이 뿐만 아니라 유럽 대륙 내의 수송망의 상황도 안습일로를 달리고 있었습니다.
가장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었던 프랑스의 철도망은 4년 간의 도이칠란트 점령 기간 중 프랑스 레지스탕스의 파괴공작을 필두로 하는 교통망 파괴작전+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위한 연합군 공군의 후방 차단 작전+철수하는 도이칠란트의 파괴 공작으로 이게 철도였는지 그냥 쇠막대기 두 개 놓고 그 아래에 나무판자 많이 깔아 놓은 것인지 분간이 안 가게 되었습니다.

결국 노르망디 해안의 후방 보급대부터 최전방 부대까지 사실상 모든 보급은 '레드볼 익스프레스'라 불리우는, 흑인 운전병의 특별 보급대에 의존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최전방 부대-역시 패튼과 몽고메리네. 여기에 꼽사리 낀 미국 브래들리네 부대까지 OTL-가 점점 노르망디 해안에서 멀어지는 바람에 수송대 자체가 소비하는 연료만도 감당할 게 못되어 가서-한 마디로, 배송료가 너무 비싸서- 결국 진격이 멈췄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사실은 당시 도이칠란트 군은 꼬리 말고 도망치기 바빠서 반격할 여유가 없었던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랄까요.
만약 히틀러가 꿈을 좀만 더 일찍 꿨더라면 정말 히틀러가 꿈 꾼 대로 될 뻔했습니다.

그리고 결국 싸움도 없고 심심한 연합군 수뇌부에서는 밥그릇 싸움이 일어나기 전의 상황이 되었습니다.
보급 우선 순위를 놓고 미국과 영국의 지상군 지휘관들 사이에서 갈등과 반목이...
북아프리카에서부터 보인 양군 지휘관들의 경쟁과 알력은 이 시기에 보급 문제를 둘러싸고 폭발 일보 직전까지 치닫았습니다.

한 편, 프랑스에서 도이칠란트군의 급격한 후퇴와 괴멸은 연합군 수뇌부를 들뜨게 했습니다.
심지어 이제 잔존한 도이칠란트군 전력은 자전거만 가진 소년병과 늙은 병사들 뿐이라는 낙관적인 추정까지 나왔습니다.
오죽하면 1944년 12월 25일을 각 병사의 집에서 보낼 수 있을 것이라는 말까지 나왔으니 말 다 했습니다.

게다가 이렇게 도이칠란트군이 안습해 할 때 몰아붙이면 쉽게 전쟁을 끝낼 수 있을 것이라는 낙관적 전망이 연합군 수뇌부의 전반적인 생각이었습니다.
그리고 노르망디 상륙 작전 이후 후방에서 휴식과 재편성 등 재정비 작업만 해온 공수부대 전력-이라기보단 간지폭풍 대량공수를 대낮에 보고 싶어서?-을  활용하고 싶어하는 지휘관들의 소망도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영국군 버나드 몽고메리 원수가 이 작전을 계획했습니다.

그런데 이 작전의 기획자가 지구방위대 미군의 아이젠하워가 아니라 영국군 몽고메리입니다?

왜 그런고 하니...
지금 영국군 상황은 별 공적도 세우지 못 한 참 안습한 부대의 전형으로,
작전명 오버로드 당시 캉 지구에서 무려 2주간 지지부진하다 미군이 도우러 오자 그제서야 점령에 성공한 가슴아픈 과거(?)를 가지고 있었던 것도 있고 제시한 바와 같이 정말 공적 하나 없이 지지부진한 자기 공훈 좀 세우려고영국군 사기를 좀 올려 주고 싶어서 이 작전을 기획했다는 성격이 큽니다.

마켓-가든 작전 계획

바다보다 낮은 네덜란드에는 라인 강이 흐르고 이 라인 강을 비롯한 뫼즈 강, 발 강에는 7개의 다리가 있습니다. 연합군의 계획은 바로 이 7개의 다리에 공수부대 병력을 투입, 다리를 점거한 후,
지상군이 투입되어 네덜란드의 제방을 지나 네덜란드 방어선과 라인 강을 돌파해 바로 도이칠란트 본토로 진입한다는 작전입니다
만약 이 작전이 성공한다면 크리스마스 전까진 전쟁을 끝낼 수 있을 거라는 것이 연합군의 계산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작전은 2개의 작전으로 구성되었습니다.

마켓, MARKET
1 연합공수군은 브라우닝 장군의 지휘를 받아 가든 작전이 개시되기 전까지 다리와 핵심 지역을 장악한다.

미국 101 공수사단 - 아인트호벤
미국 82 공수사단 - 니이메헨
영국 1 공수사단 - 아른헴
자유 폴란드 공수여단 - 약 1천명 가량의 지원부대

가든, GARDEN

영국 2 군의 지상군은 브라이언 호록스 장군의 영국 30군단을 내세워 마켓의 결과로 확보한 진격로를 따라 북쪽으로 진격.

연합군은 이 부대들로 3일 이내로 라인 강을 모두 확보, 돌파해야 하며 이 작전의 성공을 위해 공수부대가 투입될 지역엔 도이칠란트군 기갑부대가 없어야 한다는 전제 조건이 필요했습니다.
왜냐, 공수부대의 대전차장비란
대전차총, 박격포, 바주카포, 대전차수류탄, 지뢰, 소구경의 야포, 육탄 수류탄 돌진[...]과 같은
지국히 한정된 물건밖에 없으니까.

-탱크를 잡는데에는 탱크가 필요하지만 공수부대에게는 그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 작전은 9월 17일, 일요일 대낮에 개시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작전 시작!

드디어 1944년 9월 17일 일요일 오전, 병력 3만 5천여 명, 340문의 휴대용 야포 및 화포, 500여 대 가량의 각종 지프 및 소형 차량과 기타 장비, 해서 600여 톤 규모의 물자를 적재한 수송기와 글라이더가 영국 각지의 비행장에서 이륙하는 것으로 영국군 주도의 장대한 삽질크리는 막을 올립니다.

일단 1차로 시작되는 작전인 공수점령작전, 마켓의 규모로는 해안 후방 지대에 강하하는 작전명 오버로드보다 훨씬 규모가 큰 작전입니다. 아무래도 네덜란드 전 역에 걸쳐 강하하는 것이니 말 다 했죠 뭐.

그러나 작전 초기, 수송기의 고장 등으로 일부 기체가 영국, 또는 인근 연합군 비행장으로 복귀했습니다. 게다가 대낮에 강하를 했으니 도이칠란트 대공포대에게 좋ㅋ은ㅋ표ㅋ적ㅋ이 되었으며, 기타 날다가도 지들끼리 부딪혀 요단강 너머로 날아가거나 등등등[...]

여튼간 오후 2시 15분, 벨기에 - 네덜란드 국경선에서 대기 중이던 영국 30군단이 네덜란드로 진격을 개시했습니다.
그리고 지상군 또한 작전 초부터 도이칠란트군의 대전차포 공격에 발이 묶였습니다.
아무래도 네덜란드의 길이란 서울특별시 강남구 압구정동 8차선도로 같은 것이 아니라 한강변 자전거 4차선도로(...뭐지 이 비유는?) 같은, 그야말로 산 속 오솔길이 대부분이라 맨 앞을 가던 탱크 한 대만 때려 잡아도 바로 길이 막혀 버리기 십상입니다.
그런데 이런 거 생각 안 하고 근 5만명 가량을 때려 박으니 그 결과는 불 보듯 뻔하죠[...]

하여간 먼저 아인트호벤에 미국 101 공수사단이 강하합니다.
역시 미 육군 최초로 최고의 부대기장을 수여받은 부대답게 이들은 다리 하나를 점령하는 데 성공하지만 간발의 차이로 점령해야 했던 다리 하나를 도이칠란트군이 눈앞에서 요단강 너머로 날려 보내는 것을 보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현재 전 세계에서 유일하다시피 남아 있는 최고의 낙하산 강하부대인 미국 82 공수사단이 니이메헨에 강하합니다.
하지만 이들이 다리를 점령하기도 전에 도이칠란트군이 선수를 쳐 다리를 장악합니다.
결국 발 강의 다리를 두고 전선이 형성되었습니다.

한 편, 아른헴에 투입된 영국 제1 공수사단의 경우는 매우 심각했습니다.
이들이 강하한 아른헴 주변엔 연합군이 그 존재를 애써 무시하고 있던 도이칠란트 기갑사단이 배치되어 있어서 순식간에 전장의 폭풍에 휩쓸렸습니다.
그러나 이 기갑사단에 방법당했다는 것은 영국이 패배를 감추기 위한 핑계일 뿐이었으며, 실제 기갑사단들은 1개 보병사단만도 못한 전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작전 초반, 이들을 외부와 연결해 줄 통신트럭 두 대가 감쪽같이 증발하면서 이들은 순수히 자신들의 능력만으로 이 곳에서 살아 가야 할 상황에 처하고 맙니다.

이건 여담입니다만, 이 실종된 두 대의 통신차량은 정말로 말이 많습니다.
실종된 원인이 몇 가지 있습니다만, 가장 대표적인 것을 들자면

1. 글라이더로 강하하다 숲속에 추락해 아무도 살아나가지 못했고 아직까지 그들의 시신을 발견하지 못했다
2. 글라이더째로 늪지대에 쳐박았다, 물론 아무도 살아나가지 못했다.
3. 현지 주민들에게 트럭 부속품까지 소멸당했다
4. 트럭 운용병들이 쓱싹 해 먹고 날랐다

2차대전 중 가장 대표적인 미스테리로 손꼽히는 미스테리입니다.
다른 미스테리는...음...몰라요 저도[...]

하여간 이 지역에 주둔하고 있던 기갑사단은 9 SS기갑사단 호헨슈타우펜과 10 SS기갑사단 프룬츠베르크인데 이 중 9 SS기갑사단은 쓸만한 전력은 모두 프룬츠베르크에 넘겨주고 도이칠란트 본토로 이동하여 재편성 예정이라 주력인 19, 20 SS 기갑척탄병 연대는 합쳐서 2개 중대에 불과했습니다.
또 사단 포병 연대는 야포가 없어서[...] 그냥 보병으로 싸웠고, 기갑 전력도 판터 3대와 4호 구축전차-전차 잡는데 쓰는 전차랄 것도 없는 잡것?-2대가 전부였으며 예하 공병대대, 대공포대대 등도 말이 대대지 실은 한 개 중대급도 안되었습니다.

그나마 조금 사정이 나았던 9 SS 기갑수색대대는 마켓가든 작전 당일 도이칠란트로 향하는 화차에 적재되고 있었고 결국 다 합해봐야 사단 총원은 3천 명 이하로서 기갑사단은커녕 연대 전투단 수준이었습니다.
역시 10 SS 기갑사단도 9 SS 기갑사단의 인력과 장비를 넘겨받았지만 워낙 프랑스에서 포위-퇴각전 중에 큰 피해를 입어 축소된 편제에도 한참 부족했고, 그나마 괜찮은 전력이던 하인케 전투단, KG Heinke은 아헨-후일 결국 연합군이 최초로 진입한 도이칠란트 본토-의 위기가 급하다고 차출된 상태라 재정비가 시급한 보병 사단 수준도 되지 않았습니다.

다만, 존 프로스트 중령이 지휘하는 제2대대가 아른헴 대교의 입구를 장악하면서 도이칠란트군의 추가 투입을 방해했지만, 도이칠란트군이 주변에서 투입 가능한 모든 전투 병력을 다급히 투입하고 사단 주력은 다리에 접근하지도 못한 채 마구잡이로 싸우는 상황에서 아른헴 다리 입구 장악은 그다지 의미가 없었습니다.

결국 9월 18일 오후, 작전 예정 시간보다 24시간을 초과한 상태에서 영국 30군단이 아인트호벤에 도달합니다. 그러나 전날 미국 101 공수사단이 장악하지 못하고 폭파당한 다리가 복구되지 못했기 때문에 다시 후방에서 가교를 들고 와야 해서 많은 시간을 허비했습니다.
여기에 다시 네이메헌까지 진격하는 데 도이칠란트군의 대전차 공격으로 다시 많은 시간을 허비합니다.
결국 영국 30군단은 예정 시간보다 70시간을 초과해 9월 19일, 니이메헨에 도달합니다.

그러나 다리는 아직까지 도이칠란트군이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9월 18일, 아른헴 대교 입구를 방어하고 있던 프로스트 중령의 2대대는 도이칠란트 10 SS 기갑사단의 공격을 받고 있었습니다.
장갑차를 앞세우며 공격해 오는 도이칠란트군은 사단 예하 기갑수색대대인 그로텍 전투단이었고, 영국군은 피아트 대전차 로켓포를 쏘아대며 대항합니다. 결국 장갑차가 격파되면서 다리를 막아 도이칠란트군은 더 이상의 장갑차량을 다리 건너로 보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른험 시내에서는 영국 1 공수사단의 주력 부대가 혼전 상황에 빠졌고, 이에 따라 사단과 대대 간의 통신은 거의 두절 상태가 되고 있었습니다.

9월 19일, 아른헴 대교 반대편의 도이칠란트군은 영국군이 더 이상 항복할 것 같지 않자 영국군이 엄폐해 있을 것 같은 민가에 대해 무차별 포격을 퍼붓습니다. 이 포격에 영국군 대대 병력이 괴멸적인 타격을 입음으로써 더이상 영국군은 사실상 모든 전투력을 날려먹습니다.
그러나 전날 다리 한가운데에서 파괴된 장갑차로 인해 도이칠란트군은 다리 건너로 병력을 추진할 수 없었습니다.

이제 신속히 30군단이 도착하지 않는다면, 영국 1 공수사단은 결국 괴멸되고 말 것입니다!

9월 19일, 네이메헌의 30군단은 다리를 돌파할 방법을 모색하나 마땅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결국 미국 82 공수사단이 강을 우회하여 후방에서 끌고 온 보트로 강을 도하, 다시 교량쪽으로 이동해 다리를 점거한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9월 20일, 미국 82 공수사단은 보트를 지원받았지만 그 수량이 매우 적었고 예정했던 시간보다 너무 늦었습니다.
그러나 공수부대원들은 이런 상황에서 포기하지 않고 강을 건너고자 하여, 오후 3시에 도하를 개시, 도이칠란트군의 탄막으로 인해 많은 장병들이 물 속으로 사라져 갑니다.
그리고 도하가 시작된 지 얼마 안되어 강 반대편으로 병사들이 상륙에 성공해 다리를 점거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미 예정 시간을 훨씬 뛰어 넘었기 때문에 작전은 이 시점에서 실패한 것이나 다름 없게 되었습니다.

결국 9월 20일 저녁, 마침내 아른헴 대교에서 프로스트 중령의 2대대가 와해되어 아른헴 대교에서 퇴각하게 됩니다.
이와 동시에 영국 1 공수사단도 철수를 개시해 9월 21일엔 아른험을 떠나 오스테르베이크로 퇴각합니다.
이 날, 스타니슬라프 소사보브스키 장군의 자유 폴란드 공수여단이 영국 공수부대를 지원하기 위해 아른헴 지구에 투입됩니다.
하지만 이들의 세력은 워낙 미미해 곧장 영국군과 같은 처지에 놓이게 됩니다.
게다가 영국군의 세력은 너무 작았기 때문에 공중에서 투하하는 보급품의 대다수가 도이칠란트군 영내로 떨어졌습니다.
한편, 발 강을 도하하는 데 성공한 영국 30군단은 계속되는 도이칠란트군의 방해에 부딪혀 결국 아른헴에서 수십 Km 밖에 떨어지지 않은 제방길에서 진격 한계점에 도달합니다. 전투력이나 그 모든 것을 다 갖추고 잇었음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진격이 불가능했습니다.

이것은 단 한 문장으로 설명이 가능합니다.

전공에 눈이 먼 수뇌부의 오판을 아무 잘못 없는 병사들이 대신 치루었다

결국 9월 25일, 영국 1 공수사단과 자유 폴란드 여단은 새벽 6시를 기해 모든 진지를 포기하고 라인 강 너머로 퇴각합니다.
각종 중화기를 비롯해 신속한 이동이 불가능한 부상병들이 유기된 채 생존한 병사들은 죽을 고비를 넘기며 간신히 사지에서 탈출하는 데 성공하게 됩니다.

이로써 마켓-가든 작전이 종료됩니다.

얼마 뒤, 영국군 사령관 몽고메리가 80% 이상의 목적을 달성했다고 선전했지만 실제로 얻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다만 이 작전을 진행하지 않았더라면 정말로 전쟁이 1944년 12월 즈음에 임박하여 끝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17,000명의 젊은 목숨들만이 희생되었으며, 더더욱 영국 1 공수사단은 단지 2,163명 만이 간신히 살아서 돌아오는, 사실상 전멸이나 다름 없는 피해를 입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작전은 그간 전장의 최전선에서 싸워 오던 연합군 공수부대에게 큰 피해를 안겨 주었습니다.
작전이 개시된 후, 중장비를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이 보병 부대들은 그저 거점 방어에 남겨졌습니다.
그리고 이 작전이 끝난 후, 유럽전선은 결국 사실상의 소강상태에 이르었고, 히틀러가 꿈을 꾸지 않았다면 이 전쟁이 1946년까지 계속 이어질 빌미를 마련한, 여러모로 참 말이 많은 작전이었습니다.

여담이지만 이 작전에서 거진 박살난 영국 1공수사단의 이름은 붉은 악마입니다.
그래서 아른헴을 붉은 악마들의 무덤이라고 하는데 그 뉘앙스가 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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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전은 이후에도 자만하면 어떻게 되는가를 결정적으로 입증해 주는 상징과도 같은 작전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러 전쟁에서 여러 수뇌부는 이와 같은 우를 계속 범하였고, 사람은 곧 망각의 동물이라는 것을 결정적으로 밝혀 준 결과가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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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5편으로는...
미국이 2차대전 동안 유럽에서 참여했던 마지막 전투인 작전명 버시티를 다루겠습니다.


작전명 밀덕의 혼

2009년 7월 13일 월요일

003. 1944. 12. 16. His last resistance

-002. 1944. 08. 15. Mission for Our Future에 이어서 연재합니다.-

2편에서 예고한 바와 같이 이번에는 히틀러 산하 제3제국의 공식적 최후 저항인 바스토뉴 숲의 벌지 전투에 대하여 다루겠습니다.
그리고 원래 예정대로라면...
저 불그죽죽한 사각형[...] 안에 있는 내용대로 되어야 했지만 전 근성이 없어서요[...]
실은 이쪽에까지 손대면 이 카테고리를 子블로그로 떨궈 내야 할 정도로 어마어마해져서 어쩔 수 없이 이 항목은 넘어갑니다.
그러면 이상 잡설은 줄이고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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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아주 기본적으로 작전명의 유래, 입안자를 살펴 보겠습니다.

벌지 전투(Battle of the Bulge)는 제2차 세계 대전 후반기, 서부전선에서 도이칠란트 제3제국의 최후 대반격에 대해 연합군이 붙인 이름입니다.

여기서 왜 벌지 전투라고 붙였냐 하믄...
도이칠란트군의 진격에 의해 전선의 일부가 돌출된 것을 가리켜 미군이 붙여준 이름에서 유래되었습니다.
그리고 영어로 '돌출된'이라는 뜻을 가진 것은 벌지(Bulge)라, 벌지 전투가 되었습니다[...]
영화 벌지 대작전 이래로 벌지전투란 명칭이 사실상 일반화되었습니다.
도이칠란트군은 작전명 라인을 수호하라, Unternehmen 'Wacht am Rhein' 이하에서 대공세를 펼쳤습니다. 대반격은 서부전역사령부-Oberbefehlshaber West-사령관이었던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원수에 의해 입안된 것으로 룬트슈테트 공세-Rundstedt-Offensive-혹은 지명에서 유래된 아르덴 공세-Ardennenoffensive-로 불리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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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9월 4일, 영국군은 벨기에의 앤트워프를 해방하였지만, 보급거점으로써 사용하기 위해서는 근방의 도이칠란트군을 몰아낼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이걸 어디다 써 먹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이리도 한심한 생각 덕분에, 즉 가지고 있는 것을 제대로 써 먹지 않겠다는 영국 덕분에 보급선이 길어져 연합군의 진격은 정지되고 전선은 교착상태가 되었습니다.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9월 17일 버나드 몽고메리 장군이 계획한 마켓-가든 작전이 개시되어 도이칠란트 본국에 대한 침공이 시도되었으나 현지 사정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오로지 전공만을 위한 작전이었기에 몽고메리가 말하길 80%의 성공이었다지만 실은 08%의 성공이었다구요-ㅅ-
해서 전선은 다시 교착상태가 되었습니다.
이 작전이 이 모냥이 나서 연합군은 제법 큰 피해를 입었던 터라 일시적으로 진격을 중지하고 엄청난 문제가 된 보급대책의 해결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한편 동부전선, 폴란드 동부에서는 소련에 의한 작전명 바그라티온이 끝나가던 시기였기에 소소한 쉬는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기회를 놓칠 리 없던, 이미 코너에 몰릴 대로 몰린 히틀러는 자신이 가진 마지막 패를 던지는 대반격작전을 구상했습니다. 말하자면 1940년 개전 초기, 프랑스에 대한 전격전 승리를 리인엑트-재현. ㄷㄷㄷ-하는 것으로 벨기에 아르덴 지방의 삼림지대를 기갑부대로 돌파하여 단번에 앤트워프까지 진격하여 탈환, 서부전선 북쪽의 연합군을 포위, 괴멸시킨다는 작전안이었습니다.
물론 당시 도이칠란트의 군사력으로 봐도 꿈에서나 꿀 정도의 반격작전인지라 수뇌부의 룬트슈테트, 발터 모델은 당연하게도 반대했으나 히틀러는 그 꿈을 사실로 믿고서 이 작전의 성공으로 서부전선이 정체된다면, 이로써 연합군이 쫄아서 자기네하고 강화한다면 동부전선에 전력을 집중할 수 있을 거라고 추측했습니다. 은근히 불쌍합니다. 이거 뭐-ㅅ-

그리고 또 다른 작전안으로써 북부에 광대한 전선에 분산된 코트니 H. 하지스 장군 휘하의 미국 제1군을 협공하여 괴멸시킬 것을 제안했습니다. 아무래도 아무리 1개 군 병력-1개 군 병력이 최고 8만명 수준.-이라도 광대하게 분산된다면 적군의 분산포위, 각개격파가 쉽고 아군의 피해도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었습니다만...

노르망디 상륙작전 중 32만 6천명을 상륙시키고 그 후에도 속속 병력이 증원된 방대한 병력을 가지고 있던 연합군 전력의 소수를 줄이는 것 말고는 성과가 없어 이건 아무래도 전세를 역전시킬 방법이 아니었기에 그냥 버렸습니다.

...해서 작전시기는 아르덴 숲이 안개에 휩싸이는 겨울로 잡았습니다.
이미 제공권은 연합군으로 옮겨졌기에 항공기에 의한 격렬한 폭격으로부터 부대를 숨기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도이칠란트군은 그토록 극심한 인력난에도 불구하고 무려 20여개 사단을 준비하고 신예전차인 티거 2도 포함시켰으나...뚜껑을 열어 보면 동부전선에서의 출혈의 영향 때문에 거의 모든 부대가 정원을 채우지 못하였고 훈련도가 낮은데다 이 20개 사단 중에 민방위사단(?)만도 못한 새로 편성된 국민척탄병사단까지 투입시킬 정도였습니다.
아무래도 시기가 시기인지라 군수품과 연료의 부족도 심각할 정도로 증가하여 만족할 만한 양을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허나, 작전에만은 1944년 전쟁 중 최대치에 도달한 도이칠란트 병기 생산량의 대부분이 투입된 병력으로 작전에 대한 기대가 컸습니다.

하지만 공격을 예정대로 진행하기 위해서는 작전중 연합군의 보급 거점을 탈취할 필요가 있는 등...
처음부터 상당한 위험부담을 안고 있던 작전이엇습니다.
만약 한 가지라도 잘못되는 상황이 벌어지면 작전 전체에 심각한 영향을 줄 가능성이 매우 높았지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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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연합군 수뇌부에서는 도이칠란트군 집결정보나 공세작전의 징후를 보고받았으나 도이칠란트에게는 공세에 나설 여력은 남아있지 않다고 판단, 다시 한번 작전명 마켓-가든에서의 우를 범하고 맙니다. 오죽하면 아르덴지방은 깊은 삼림과 산악지대였기에 기갑부대가 쉽사리 통과할 수 없다고 판단, 이 지역의 방위에는 이제껏 전투의 선봉부대로써 이미 전투력을 거의 상실한 병력을 배치, 여기서 재편성을 할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이 생각은 엄청난 출혈를 맛보게 해 주었습니다.
게다가 연합군 수뇌부는 도이칠란트군이 1940년에 같은 지역에서 영국과 프랑스의 연합군 사이를 뚫고 기갑사단으로 프랑스에 쳐들어갔던 적이 있었다는 것을 완전히 잊어먹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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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디 도이칠란트는 9월 중순에 아르덴 숲을 통과하여 공격을 감행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주력은 서쪽으로 진격하여 뮤즈강까지 도달한 뒤 북서쪽의 앤트워프와 브뤼셀로 진격할 예정이었습니다. 가장 곤란한 것은 작전개시로부터의 신속한 이동이라 생각할 수 있으나, 뮤즈강을 넘는다면 극적으로 전세가 역전되어 해안까지 도달이 가능할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리고 이 작전은 연합군 첩보본부에 라인란트의 방어작전과 오인시키기 위해 '라인을 수호하라, Wacht am Rhein'라고 이름붙여졌습니다. 이것은 도이칠란트의 노래에서 따온 명칭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공격의 성공에는 3가지 요점이 요구되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1. 공격은 완벽한 기습이어야 한다.
2. 악천후여야 한다.-연합군의 제공권을 무효화, 보급로를 확보.-그래서 시기는 겨울 중에도 혹설기로.
3. 신속한 진격이어야 한다는점. 모델 원수는 뮤즈 강까지 4일만에 도착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1944년 12월 16일, 도이칠란트군은 벨기에 아르덴숲을 통과해 진격을 개시했습니다. 아무래도 시기가 시기였던지라, 게다가 숲인지라 안개와 같은 악천후의 힘으로 인해 연합군은 항공기를 띄울 수 없어 도이칠란트군은 상당한 도움을 받았습니다.

여하간 기습으로 허를 찔린 미들턴 장군의 미국 제 8군-현재 한국에 주둔하는 미 8군과는 연관이 있을지도...?-은 클레르보, 호지겐 등 일부거점에서 완강하게 저항했으나 여단, 연대, 대대등 고급 지휘관의 전사 및 부상-각각 준장, 대령, 중령 혹은 소령-이 속출하여 지휘체계가 괴멸되어 부대가 와해된다거나 지휘관의 부재로 작전통제가 되지 않아 포위되거나 하는 위급한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충격과 혼란을 틈타 벌어진 도이칠란트군의 쾌진격은 작전 개시 후 수일 동안만 계속되었을 뿐이었지 막상 12월 하순에 이르자 도이칠란트군의 주력부대는 여러 지역에서 급히 증파된 연합군-주축은 미군.-에 의한 강력한 저항을 만나 전진은 이제 정체됩니다. 그리고 개별 전선의 진격속도도 큰 편차가 생겨 속공에 성공한 부대가 역관광당하는 사태가 속출했습니다.

처음에 히틀러는 연합군이 이 사태에 대응하는 데 시간이 어느 정도 걸릴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도이칠란트군의 대규모 공세라는 것을 인식하는 데 수일, 아이젠하워가 각국 수상과 상담하여 부대의 배치전환을 명령하는 데 수일, 그리고 배치전환 명령을 받은 부대가 현지에 도달하는 데 수일이 걸릴 것이라고 내다보았습니다.
이 정도로 시간이 걸린다면야...작전은 틀림없이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만 아이젠하워는 히틀러의 수하들과는 달리 상당한 부대 배치에 대한 재량권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로써 대규모 공세라는걸 파악하는데, 부대 배치에만 시간이 걸려 사실상 히틀러의 생각은 초장부터 어긋나기 시작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써 당시 프랑스에서 재건 중이던 101 공수사단을 바스토뉴로, 82 공수사단을 생비트로 급히 증파했습니다. 이것으로써 도이칠란트의 반격작전은 어긋나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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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12월 23일, 날씨가 회복되면서 연합군은 공중폭격과 공중보급을 개시했습니다. 항공폭격은 도이칠란트군의 보급기지를 안드로메다 워프게이트에 태워 보냈고 전투기들은 도로상의 도이칠란트군을 공격했습니다. 거기에 포위된 바스토뉴에 대해 공중보급으로 의약품, 식료, 모포, 탄약이 보급되었습니다. 그리고 지자원한 외과의사팀이 글라이더로 현지에 투입되어 부상자 구호작전을 실시했습니다.

한편 12월 24일, 보급선이 늘어지다 못해 끊어진 도이칠란트군의 진격은 뮤즈강 근처에서 정지했습니다. 아무래도 연료와 탄약의 고갈이...또한 작전이 개시된 뒤 도이칠란트군은 무선봉쇄를 해제, 연합군 정보부는 손쉽게 도이칠란트군의 위치를 알아내어 시기, 상황 적절한 반격이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점에서 도이칠란트군의 손실은 제법 경미한 상황이었습니다.
해서 24일 밤 한스 폰 만토이펠은 작전의 중지와 철수를 요청했으나 히틀러는 이를 거절하였습니다.

그리고 패튼의 제 3군은 바스토뉴와 바스토뉴에 포위된 부대를 구원하기 위해 전투를 계속했습니다. 마침내 12월 26일 16:50분, 제 3군예하 4기갑사단의 일부가 바스토뉴에 도달하여 포위망을 깼습니다.
그리고 시간은 어느새 지나 1월 13일, 도이칠란트군은 바스토뉴에서 퇴각했습니다.
종래에는 1월 23일, 도이칠란트군 사령부에 의해 작전중지가 결정되었습니다.
이리하여 전투는 공식적으로 1945년 1월 27일날 종료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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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 작전이 끝나고...히틀러의 바램과는 달리 그저 겨울날의 백일몽으로 끝났습니다.
이 작전 덕분에 도이칠란트에 그나마 남아 있던 도이칠란트의 전투부대, 보급망은 사실상 소멸되어 연합군의 진격을 더욱 더 앞당겼고, 이 덕분에 동부전선에 병력을 투입할 여력조차 없어...
히틀러의 소망과는 달리 결국 전쟁을 더욱 더 빨리 앞당기는 결과를 낳고 말았습니다.

역시, 꿈은 혼자 꿔야 제맛입니다. ㄷㄷ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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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다음 4부로는...
노르망디니 어디니 하여간, 그런 지역에서의 세부 작전을 다루려고 했습니다만 위에서 다룬 이유로써 그냥 접습니다;ㅅ;
해서 4부로는 08%의 성공을 거둔 작전명 마켓가든을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작전명 밀덕의 혼

2009년 6월 18일 목요일

002. 1944. 08. 15. Mission for Our Future

-001. 1944. 06. 06. The longest day에 이어서 연재합니다.-

그런데 2009년 02월 11일 작성되었던 1편에 비해...
연재 주기가 그야말로 충격과 공포입니다[...]
그런다고 자료 수집에 시간이 기하급수적으로 걸린 것인가...아닙니다.
그러면 그저 궈찮아서 밀린 것이냐...이것도 아닙니다.
그저 잊어먹었을 뿐.
[...그냥 나가 죽어라 ┓-]
일단 서장의 잡설은 때려 치고(?) 바로 들어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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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8월 15일, 당시 도이칠란트군 점령 하에 있던 프랑스 남부 지역에 연합군의 침공이 이루어졌습니다. 이 작전으로 연합군은 캉과 툴롱 사이의 지역을 탈환하는데 성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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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전명 용기병-Operation Dragoon-의 초기 작전명은 모루-Operation Anvil-였습니다.

원디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작전명은 ‘망치’였습니다.
즉 대장간에서 모루에 쇠를 올려놓고 망치로 두들기는 식으로 도이칠란트군을 양쪽에서 격파한다는 의미였습니다.
그런데 왠지 좀 망치하고 모루 하면 좀 충공그깽이 아니어 보인건지 어쩐건지[...] 여튼간 두 작전 모두 작전명을 바꿨습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은 ‘절대군주’
-원래 과적 등의 뜻을 가진 Overload였지만, 이 작전에서는 군주를 넘는다[...]로써 절대군주로 해석된 듯 합니다.-
로 변경하였고, 이에 따라 작전명 모루의 경우 ‘작전명 용기병(작전명 龍騎兵, Operation Dragoon)’으로 바꿨습니다.
이 작전명은 작전을 제의한 영국의 윈스턴 처칠-이하 처칠- 수상이 지었다고는 하는데...
이는 나중에 훼이크임이 밝혀졌습니다[...어째서??]

처칠은 작전명 용기병이 발칸 반도, 그리고 가능하다면 여타 동유럽 국가들의 석유 생산 지역에 대한 침공에 사용되는 것이 더 나을 전력을 빠가는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즉, 그 전력이 동유럽의 석유 생산 지역에 대한 침공에 사용될 경우 도이칠란트가 전쟁에 필요로 하는 석유의 확보에 악영향을 줄 것이며...
-당시 도이칠란트는 일찍이 발칸 반도를 맛있게 먹어 치운 상태였습니다. 제 블로그의 이 포스트에서 직접적으로는 아니지만 문맥상 잠깐 언급된 바 있습니다.-
...아니 그냥 이 지역을 도이칠란트에게서 뺏어서 소련이 앞질러 점령하는 것을 예방함으로써 제2차 세계대전 후에 이어질 평화기에 서유럽을 위한 더 나은 상황을 조성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한 마디로 줄여 말하자면 벌써부터 냉전의 싹이 보입니다.

그러니까 바르샤바 조약기구 같은 것이 만들어짐을 방지할 뿐만 아니라, 동유럽을 소련에 대한 견제세력으로 형성함으로써 소련의 침공으로부터 서유럽을 보호한다는 소리입니다.
여하간 이 망할 자본주의 친인척들 같으니라고-ㅅ-

...여튼간 이리저리 잡설로 얼룩진 초반 내용은 이제 접어 두고 본론으로 넘어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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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프랑스 군과 미군으로 이루어진 혼성부대가 툴롱과 마르세이유, 두 항구도시는 물론이거니와 프랑스 남부의 휴양도시 생 트로페까지 점령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작전입니다.
1944년 내내 재검토된 이 작전은 연합군의 전력을 이탈리아 전선에 계속 투입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영국군 수뇌부와 연합군의 후원자이기도 한 미군 수뇌부 사이에서의 갈등을 초래했다. 이는 영국과 미국의 거대한 전략적 불일치의 한 사례이기도 했습니다.

1944년 6월 초의 로마 함락과 함께 계속 해안에서만 밍기적거리던-이라기보단 영국군 크리ㅠㅠ-연합군은 드디어 노르망디 교두보로부터 진격해 나가는 작전인 작전명 코브라-Operation Cobra-가 성공하자 용기병 작전도 탄력을 받았습니다. 이로써 용기병 작전의 D-Day는 1944년 8월 15일로 정해졌습니다.

이에 따라 미육군 6군단 사령부, 7군 사령부와 훗날 프랑스 육군 제1군이 되는 자유 프랑스 육군 제B군 및 제1군단과 제2군단, 그리고 제51야전병원이 이 작전 과정에서 편성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작전계획에 따라 자유 프랑스 군과 미군을 합체(?)하기 위하여 용기병 작전을 실시할 전력의 일부인 미육군 제6군은 제이콥 L. 디버스 중장의 지휘 하, 1944년 8월 1일 코르시카 섬에서 출발합니다. 이 작전의 초반은 지중해 지역 연합군 사령관인 헨리 메이틀랜드 윌슨 경이 담당하였습니다. 하지만 작전이 개시된 후 한 달 뒤, 지휘권은 서유럽지역 연합군 총사령관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장군이 지휘하는 연합군 최고사령부 관할로 넘어갔습니다.

공격부대는 미군 제6군단 예하 3개 사단들로 이루어졌으며,
여기에 자유 프랑스 군의 기갑사단이 편성되었습니다.

상륙 지역과 각 부대명은 아래와 같습니다.
3사단-프랑스 카발레어 수르 메르, 코드명 알파 해안 -Alpha Beach-
45사단-생 트로페, 델타 해안 -Delta Beach-
36사단-생 라파엘 오른쪽(?), 카멜 해안 -Camel Besch-
93야전병원-생 맥심 -H-6
위와 같습니다.


또한 이 작전이 있기에 앞서 작전명 로미오-Operation Romeo-에 따라 자유 프랑스 특수부대가 주 공격 축의 서쪽에 있던 니그레 곶에 배치된 도이칠란트군의 해안 포대를 파괴하기 위해 상륙했습니다.
이 부대는 양쪽 측면에 상륙한 또 다른 자유 프랑스 특수부대들과 1공수임무부대의 증원을 받았습니다.

-1공수임무부대, 1st Airborne Task Force...?
1공수임무부대는 예하
영국군 2독립공수여단
미군 517공수연대, 미군 509독립공수대대와, 550 글라이더 독립공수대대, 1대대, 551공수독립연대로 이루어진 글라이더 공수부대로 편성되었습니다.-

참고로 1공수임무부대의 지원 작전은 작전명 비둘기-Operation Dove-라 합니다.
그리고 작전명 시트카-Operation Sitka-의 수행 결과로써 확보된 교두보의 보호를 위한 해안 근처의 두 섬을 점령하는 작전이 1공수임무부대에 의해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포티튜드 작전과 같은 기만작전인 경간작전-Operation Span, 여기에서 경간이란 두 개 다리 교각의 사이 거리를 의미합니다.-이 실시되어 도이칠란트군을 낚았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덧붙여서 자유 프랑스 해군 소속 전함 로레인과 영국 전함 레밀리에스, 미국 전함 텍사스, 네바다, 아칸소와 50척 이상의 순양함 및 구축함을 비롯한 연합군 함선들로부터의 함포사격이 상륙작전을 엄호했습니다. 여기 더하여 7척의 연합군 호위항모-항모와는 다릅니다 항모와는...!!-가 제공권을 확보해주었습니다.

작전 결과 9만 4천 명 이상의 병력, 1만 1천 대 이상의 차량이 상륙 개시일에 상륙했습니다.
이 당시 프랑스에 주둔 중이던 상당수의 도이칠란트군 병력은 작전명 오버로드 이후 이후 프랑스 북부지역에서 연합군을 막는데 모든 전력을 기울이던 상태였으며, 이외에도 OSS(미국정보국, CIA의 전신) 소속 아론 뱅크 대위의 지원을 받고 있던 프랑스 국내군-한 마디로 레지스탕스-에 의해 공격이 이루어짐으로써 도이칠란트군은 알프스의 로마군 꼴이 나고 말았습니다. ㅎㄷㄷ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연합군은 내륙으로 진격했습니다. 그리고 내륙으로 들어가면서 프랑스 국내군과 합류했습니다. 24시간동안 무려 20마일을 진격해 들어간 것이 노르망디 상륙작전과 절묘하게 맞물리면서 연합군은 대성공을 거두었으며 파리에서 프랑스 국내군이 봉기를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한편 도이칠란트 9군의 빠른 후퇴는 연합군의 작전 성공 요인 중 하나였습니다. 오죽하면 도이칠란트군의 저항보다 진격하는 부대의 차량에 연료를 공급하는 문제가 작전에 있어 더 큰 장애요인
-이 문제는 노르망디에 상륙한 연합군도 같은 문제로 상당한 골머리를 썩히고 있었습니다.
현대전에 있어 석유란, 금보다 중요합니다 ㄷㄷㄷ-
으로 떠오르는 상태였습니다. 여하간 이 문제 같지도 않은 백괴스러운 문제 덕분에 도이칠란트군 잔존병력이 프랑스의 보주 산맥, 심지어 도이칠란트로 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9월 중순, 작전명 용기병에 참가한 모 부대는 작전명 오버로드에 참가한 부대 중 남쪽으로 진격한 부대와 디종에서 상봉하였습니다. 그런데 눈물은 안 흘렸다나봐요. 남희석은 당연히 없었고요[........썰렁]
 
여하간 이 작전명 용기병으로써 예상되던 효과는 바로 마르세이유 항의 사용이었습니다.
작전명 코브라와 작전명 용기병 이후 연합군의 신속한 진격은 보급의 부실함으로 인하여 1944년 9월부터 거의 중단되다시피 할 정도로 느려졌습니다.

이에는 패튼 장군과 몽고메리 장군의 경쟁으로 인한 무리한 전선 확대
-무리한 전선 확대로 인해 도이칠란트군 저항지를 지나쳐가며 진격을 하여 공식적으로는 연합군 점령지역인데 이 안에서 도이칠란트군 잔존병력이 남아 저항을 하는 등[...]-
노르망디 상륙작전 전에 이루어진 연합군의 폭격으로 인한 육상 운송시설의 부족
상륙작전 후 도이칠란트군의 항구 파괴, 이로 인한 유럽 북부지역의 항구 시설의 부족

이러한 이유로써 상당한 공백이 발생한 보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엄청난 양의 보급물자가 프랑스 남서부 지역으로 유럽 대륙에 보급될 것이엇습니다.
한 편, 마르세이유 항구와 프랑스 남부지역의 철도는 심란할 정도로 파괴되었지만 상륙 직후 신속히 복구되었습니다.

결국 작전 결과, 도이칠란트와의 전쟁에 있어 연합군이 필요로 하던 보급물자의 약 3분의 1을 지원해줄 수 있었을 정도였습니다. 즉, 전체 결과를 종합해 보면 작전은 모두 성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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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다음 3부로는...
바로 1944년 12월에 벌어졌던 히틀러의 마지막 저항,
바스토뉴 숲의 벌지 전투에 대하여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아무래도 시험기간 크리-7월 2일부터 고사 시작 ㄷㄷㄷ-가 겹쳐시간 순으로 작전을 알아내 정리하는데 심각한 문제가 생겨서 말입니다 ;ㅅ;

실은 3부로는 작전명 오버로드와 작전명 용기병 중 개시된 작전
-위쪽의 작전명 코브라라던가 작전명 포티튜드라던가...-
들을 '간략하게' 다루려고 했습니다.

그런데...그게 자료 수집에 천문학적인 시간이 걸릴 듯 하고, 무엇보다 국내에서는 이런 작전에 대한 자료를 구하기 어려워 해외 사이트까지 들낙날락 해야 할 것으로 예상되므로....아아;ㅅ;


작전명 밀덕의 혼

2009년 2월 5일 목요일

001. 1944. 06. 06. The longest day

삽화를 그려 둔 것이 있기는 합니다만 역시 스캔하기가 귀찮아서[...] 취재한 사진으로 대체합니다.


취재 자료 출처


Salamander社, D-Day

Foreword by Winston S. CHURCHILL


 OPERATION OVERLOAD

from its planning to the Liberation of par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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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대 상륙지역 표시도>


때는 바야흐로 1944년 6월 6일 프랑스 노르망디,

당시 3-4개의 도이칠란트 대서양 방벽 방어사단은 연합군 6개 사단, 3개 여단, 4개 대대병력이 해안으로 물밀듯이 밀려 오는 것을 사실상 지켜만 봐야 했습니다.

그렇게 연합군이 해안 교두보를 세우고 이제 본격적인 '쾌진격'을 시작할 준비를 하고 있었을 무렵,

당시 프랑스에 주둔하고 있던 '연합군 상륙시 즉각 대응이 가능했던' 2개 기갑사단, 1개 기갑군단은 프랑스 레지스탕스들에 의한 보급창고 파괴, 교통로 파괴, 전차장 저격등으로 인하여 아직도 프랑스 도심을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었고

도이칠란트군 지휘부에서는 노르망디 해안에 상륙한 것인지, 칼레 해안에 상륙한 것인지 알지도 못했고, 설령 알았어도 복잡하게 얽히고 설킨 지휘부의 혼재로 인하여 반격의 기회는 커녕 부대를 누가 지휘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상황에 빠져 있었습니다.


<5개의 상륙 후보지,

1. 네덜란드-벨기에 남부 해안지역

2. 파 드 칼레

3. 솜므 강 하구

4. 세느 강 하구

5. 노르망디 해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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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원정군-연합군

총 지휘관-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버나드 몽고메리-영국,캐나다 지상군 총지휘관

오마 브래들리-미국 지상군 총지휘관

배르트람 램지-해군 총지휘관

트래포드 르-말로리-공군 총지휘관

전체 병력

1944년 06월 11일 기준

326.000명

피해 상황

전사 53.700명

부상 155.000명

실종 18.000명

 

제 3제국-도이칠란트

게르트 폰 룬트슈테르-서부지역 총사령관

에르빈 롬멜-B집단군 사령관

전체 병력

미상-약 40만명 가량으로 추정-

피해 상황

전사/사망/실종 약 20만명으로 추정

포로 약 20만명으로 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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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군은 먼저 노르망디 해안을 5개로 분할합니다.

유타, 오마하, 골드, 주노, 스워드.

 

<74, 75쪽>


이런 식으로 분할한 이유는 몇가지가 있겠습니다만 그 중 가장 중요한 한가지를 들자면

바로 지휘의 효율입니다.

어차피 다 같은 연합원정군 소속이지만 연합원정군 맡에만 해도 대체 몇개 군단이...;;

한 명의 장교가 무려 이십만 몇천몇백명 하는 부대를 지휘하는건 나가토 유키가 아닌 이상, 아니 나가토 유키라도 불가능합니다.


-다 아시는 이야기이지만 당시에는 이렇다 할 모니터 달린 퍼스널 컴퓨터가 없었습니다;;-


이래서 이렇게 쪼개 놓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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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디 연합군의 상륙 예정일은 1944년 6월 5일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해안의 기상 악화로 상륙작전이 '무기한' 연기되었고 연합군 사령부는 고심에 빠집니다.

그리고 노르망디 해안에 약 40KM까지 진격한 상륙 선발대를 일시 후퇴시킵니다.

6월 5일을 기점으로 해안의 며칠간 기상이 악화된다는 기상 예보,

하지만 6월 6일 단 하루만큼은 날씨가 살짝 갠다는 예보.

기상 중계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현재의, 지금으로부터 약 60여년 전입니다.

그 조악한 기상 관측 결과 얻어진 꼴랑 '하루' 갠다는 예보를 어떻게 믿고 어떻게 3개 공수사단을 낙하시키고 6개 사단을,3개 여단을, 4개 대대를 상륙시킨다는 말입니까?

하지만 이번 기회를 놓친다면 다시 내년 이맘때 상륙을 개시해야 하고...

그 동안 히틀러가 어떻게든 알아 내고 방어를 강화할테고

혹은 동쪽에서 물밀듯이 밀려 오는 스탈린의 소련군에게 유럽 대륙을 몽땅 빼앗길 테고.

게다가 이탈리아 전선은 이미 고착상태에 빠진 지 오래이고.

결국 연합원정군 총사령관, 드와이트 D.아이젠하워 장군은 위험한 결정을 합니다.

1944년 6월 6일 단 하루가 갠다는 예보, 나는 믿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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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1944년 6월 5일 저녁, 저 유명한 미국 101,82 공수사단, 영국 6 공수사단이 노르망디 해안에 강하, 노르망디 후방을 교란하고 도이칠란트군의 상륙 방어망을 파괴하기 위하여 영국 본토에서 이륙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도버 해협의 연합국 해군의 엄청난 대 함대를 볼 수 있었습니다.


유타

6월 6일 01시 후방에 미국 101, 82 공수사단 강하,

미국 4 보병사단/2, 5 레인저 대대 상륙


오마하

미국 1, 29 보병사단/2 레인저 대대 상륙(예하 8개 중대)


골드

6월 6일 01시를 기해 영국 6 공수사단 강하

영국 50사단/8 기갑여단 상륙


주노

캐나다 3 보병사단/2 가갑여단/영국 48 코만도 대대 상륙


스워드

영국 3 보병사단/27 기갑여단 상륙


<지도 보기 어려워도 익숙해지면 편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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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여기는 도이칠란트군 사령부. 대서양방벽을 방어하고 있는 부대를 지휘해야 하는 에르빈 롬멜, 즉 사막의 여우는 아내 생일이라 잠시 자리를 비웠습니다.

여기서 잠만, 왜 사막의 여우가 사막에 없고 유럽에 왜 있는지는...?

영국 몽고메리+미국 패튼+미국의 물량공세에 밀려 자신이 지휘하던 아프리카군단을, 그 많던 탱크와 보병들을 이집트,튀니지 등등...에서 몽땅 잊어먹고

소수의 병력들과 유럽으로 건너와-사실상 탈출이었죠.- 대서양 방벽을 방어하라는 히틀러의 명령을 받들고 있었죠.


 <그 장대한 대서양 방벽의 일부. 방벽이 뭐 별 거 있나요.

사람/탱크가 못 들어오게 하면 그게 방벽이지.>


그리고 연합군이 실시한 포티튜드 작전,


<포티튜드 작전 수행의 결과 생성된 백괴스러운 괴물체(?)들.

좌상면 탱크, 중간 상륙함, 우하단 트럭>


무전병들이 없는 부대를 거기 있는 마냥 전파를 이리저리 흘리면서 통신을 한다던가 모형 전차들을 때로 만들어 이리저리 세워 놓는다던가 모형 상륙함을 때로 만들어 이리저리 세워 놓는다던가...

이때 롬멜장군을 이리저리 두들겨 패 주셨던 패튼장군님은...

얼마 전의 부하 폭행 사건으로 그 없는 부대의 지휘관을 맡는 수모를 당해 주셨습니다..;;

노르망디가 아닌 큰 부대-패튼 장군의 부대입니다.-가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영국 해안과 근접한,

사상 최대의 기만작전이라 불리우는 낚시질로 인해

게다가 가장 상륙하기 편한 칼레 해안에 대충 때려잡아 봐도 약 8개는 넘어가는 숫자의 사단을 집중시켜 두었습니다.


<후에 이 사단들은 도이칠란트군 사령부에 의하여 대다수 현 위치에에 가만히 서 있다가 드디어 실제 존재하는 부대의 지휘를 맡으신 패튼 장군님이 미친듯이-정말 미친듯이 진격했다고 합니다.-달려오시자 별 다른 활동도 못 해보고 사실상 후퇴만 하다가 전쟁 수행 능력을 서서히 잃어가다 걸국에는 괴멸되었습니다.>


하기야 연합군이 코앞에 있는데 아내 생일 축하해 주러 간 롬멜 장군님도 이해가 되는 게 그날 날씨가 안좋아서 설마 상륙이야 하겠나는...그런 생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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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해안을 순찰중이던 도이칠란트군 병사 몇 명은 몹시도 수상해 보이는 새하얀, 그리고 비단으로 만들어진 엄청나게 커다란 천뭉치와 국방색, 카키색의 천뭉치를 여기저기서 발견합니다.

그리고 이 수상한 발견 후

적의 침공이다

를 외치려는 순간, 그들은 자신들이 눈치조차 못 채게 다가와 순식간에 쓰러트리는 카키색 군복의, 심지어 걔들 중 일부는 총도 들고 있지 않던, 오른쪽 팔에 성조기를 단 군인들을 생애 마지막으로 목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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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노르망디 상공의 미군 2개 공수사단은 '살짝 갠 날씨'의 위력을 절실히 느끼고 있었습니다.

자성을 띄지 않게-레이더의 오작동을 막기 위해서였답니다.-칠을 해 놓아 안 그래도 무려 2Kg에 육박하는'철모'의 무게를 더 늘려놓았던데다 위장망, 거기다 무슨 멋에선지 달아놓은 퍼스트 에이드 키트가 그 무게를 엄청나게 늘려주고 있었습니다.


거기다 날이 잘 선 문구용 칼로 자르려고 해도 잘 잘리지 않을 정도로 질기고 두터운 캔버스 천 같은 것으로 만들어진 턱끈이 끊어질 정도로 엄청난 바람과 낙하지역을 찾아는 갔는데 낙하 유도장치 건설에 실패한 패스파인더-Pathfinder, 지상 유도반-들의 활약, 어떻게 알아낸 도이칠란트 대공포대


<비록 당시는 기관충 4문의 쿼드포가 대다수였지만 당시의 조악한 항공기 제작기술이...

게다가 가끔 등장하는 88MM 대공포도 한 몫 단단히 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작전에 처음 투입된 겁에 잔뜩 질린 수송기의 파일럿들, 그리고 어두워서 땅을 확인할 수 없어 아무데나 대충 병사들을 뿌린 항공항해사(?)들의 활약으로 공수부대원들은 이곳 저곳 마치 분무기로 뿌리듯이-원래 예정대로라면 물을 흘리듯이-강하했고, 심지어 같은 항공기에서 강하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무려 10Km나 차이가 날 정도로


-설마 진짜 이러기야 하겠냐만, 이건 실제 참전 병사들의 증언입니다.-


이리저리 정말 제대로 분무되었습니다.

하지만 분무된 와중에도 그들은 서로서로 모여서, 심지어 작전지역이 달랐던 바, 서로 만날 일이 없었던 101사단과 82사단의 중대가 합동으로 작전을 펼치며 자신의 목표물을 부수거나 점거하기 위하여 미친 듯이 노력했고 여기저기 분무된 탓에 강하한 공수부대원들의 규모를 파악하기 어려웠던 도이칠란트군도 결국 분전에 분전을 거듭,


사실상 전투불능상태에 빠집니다.

그리고 상륙 본진이 상륙하려는 무렵, 드디어 각 공수사단들은 각자의 목표를 거의 이루는데 성공합니다.

그리고 한편 영국 6 공수사단은...

주력이 낙하산으로 강하하는 미군 공수부대와는 다른 '글라이더'를 이용하여 강하합니다.

여기서 잠깐, '행글라이더'떠올리시는 분이 많으실 것 같은데 여기서 '글라이더'란 일반적인 서울시내 도로를 굴러다니는 파란색 버스만한, 혹은 지하철 한 량만한-대충 그 크기입니다..;;-날개를 단 나무로 만든 무동력 비행기입니다.

왜 이런 무책임한 방법으로 강하를 시켯는지는 모르겟습니다만 미군도 이걸 쓰기는 썼었습니다. 병력-327 글라이더 연대 같은-을 강하시키는데, 단지 병력뿐만이 아닌 지프나 야포등을 수송하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사실상 비행기로는 수송이 어려운 쇳덩이를 그냥 땅으로 떨어뜨렸다 고장나면 안되니까 나무로 케이스를 만들어 방향만 조정할 수 있게 조타장치 만들어 주고 착륙하다 부서지지 말라고 바퀴 달아주고 수송기 1대 혹은 2대를 이용, 인계철선을 이용해 예인하다 적절한 고도에서 인계철선 끊어 버리고 알아서 착륙하라는, 그런 무책임한 징비 되겠습니다.

이야기가 딴 데로 새버리네요-_-

 

여튼 계속 이어서, 6 공수사단은 그렇게 글라이더를 타고 쿵하고 떨어집니다.

그런데 날씨가 안 좋다고 했었잖아요,

비내린 풀밭에 활공을 하는데 그게 어디 쉽겠습니까...

그래서 강하 도중 목이 부러지고 허리가 부러지고 사람이 튕겨 나가고 고정시켜 놓은 지프기 막 굴러다니고 포탄이 비상 탈출을 하고...

그래서 비단 대공포와 겁에 질린 예인기 파일럿&항공항해사 콤비뿐만이 아닌 이러한 이유로 강하 도중 꽤 피해를 보고...

하지만 영국군은 이런 진리의 안습상황 속에서도 자신들에게 주어진 임무를 모두 수행하고, 이게 서유럽전선(이하 서부전선)에서의 전체 영국군의 사실상 마지막 전과라는 것을 모른 채 그렇게 작전에 성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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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노르망디 해안에서는 상륙 30분만에 70%가 전사한 해안개척대-UDT의 역할을 합니다.-를 따라서 연합군 병력은 해안에 상륙합니다.

그리고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무대가 된 오마하 해변에서는...

A 지역에 갔어야 할 중대가 C지역에 가고 분명히 2차 상륙대와 함께 왔어야 할 본부 구축이 목표인 의무대대-총대신 타이프라이터와 텐트용 천뭉치를 들고 있던-가 주력 공격 팀에 섞여 있는 등... 그리고 조악한 방수천으로 튜브를 만들어 달아 물에 뜨게 만든 27대의 미군 전차-M4 계열의 셔먼전차, 그래도 당시 최신이던.-는 '파도'때문에 단 2대만 살아 남는다던가 해안에서 너무 멀리 출발시킨 수륙양용 전차는 물 속으로 잠수를 하고...


게다가 혼자서 무려 2700킬인지 3000킬인지, 여하간 기관총 쏘다가 한 40여명 타는 상륙정 몇 척을 완전히 쓸어버렸다고 주장을 하던 한 도이칠란트 병사와 하필 밀물이 아닌 썰물때 상륙을 한 통에 뛰어가다 지쳐서 쉬다 총에 맞아 죽을 정도로 길었던 해안.

 

게다가 마침 이 오마하 해변은 도이찰란트군중 정예병이던 무장친위대, Waffen-SS가 지키고 있었는데다 그토록 부족한 도이칠란트의 지뢰, 말뚝 등의 부족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완벽하게 갖춰진 해안 방어시설이...

그러니까 간단하게 비교를 해 보자면 쇠파이프를 든 조폭 때거지 앞에 내던져진 입대(?) 1주일 된 전경 1개 중대 꼴이 되어 버렸다는게 어쩌면 그나마 정확한 비교가 되겠군요...;;

하지만 방어하던 부대가 아무리 정예병이라는 무장친위대라고 해도...

주 해안 방어병력이 칼레 해안에 묶여 있었던 터라 결국 미국의 '물량공세'를 막아내지 못하고 괴멸됩니다.

그리고 다른 해안에서의 상륙은...오마하 다음가는 유타 해변에서의 상륙전은 거의 경미한 저항만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나머지 해안,즉 주노, 소드, 골드에서는 거의 없다시피한 저항 덕에

작전명 오버로드를 통틀어 전사+실종 7만명, 부상자 15만명에 달하는 피해 중

오마하 해변에서만의 피해가 전사, 사망 통틀어 3000명으로

-그리 많지 않다구요? 상륙 직후 단 1시간동안 발생한 사상자의 공식 기록입니다.-

얼마나 극심한 상황이었는지 잘 알게 해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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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사실상의 뻔한 기습공격을 당한 도이칠란트군은 위에서 말했듯이 지휘계통의 혼란, 전투력의 분산으로 인한 실제 전투력의 약화, 그리고 여러 변수들로 인해 사실상의 2차 방어병력은 방어는커녕 제 위치 사수도 못 해냅니다.

일단 프랑스 파리 등지에 주둔하고 있던 2개 기갑사단, 1개 기갑군단. 이들도 SS소속의 정예사단으로 바로 연합군의 상륙 즉시 대응에 나설 사실상 방어 1군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이 연합군의 상륙 소식을 듣고 즉각 출발합니다.

그러나 차라리 안 가느니만 못한 상황이 벌어집니다.

 

바로 후에 '프랑스 국내군'의 칭호를 얻은 프랑스 레지스탕스-마키 단 등 여러 이름이 있습니다만 그냥 통틀어 레지스탕스라고 하겠습니다.-의 저항이 사람 미치도록 만듭니다.

이를테면 길가에 지뢰를 묻어 선두차량을 박살내-탱크 한대 무게 약 30-60T-진격을 방해한다거나 전차장 저격, 길가 부비트랩, 지뢰 덕에 노이로제에 걸린 운전병을 위하여 길가에 접시를 뒤집어 놓는[...]식의 낚시질 등, 그리고 좀 더 적극적으로는 무기고를 폭파한다던가 유류고를 파괴한다던가 교량을 끊는다거나 철로를 파괴한다던가-후에 연합군의 사용이 난감할 정도로 심각하게 파괴했다고 합니다.-직접 교전을 벌여 피해를 입힌다거나..

 

그래서 '정예' 2개 기갑사단 1개 기갑군단은 해안까지 가는데도 무시하지 못할 수준의 피해를 입고 이미 연합군 상륙 2군이 거점을 완전히 장악하여 이제는 도버 해협에 쓸어넣을 생각도 못 할 즈음, 노르망디 지역의 교통 요지인 '생 로'지역에서 더 이상의 진격은 소용이 없다는 것을 느낀 것인지 진격을 멈추고 연합군이 '생 로' 지역에 오기만을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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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편 상륙에 성공한 연합군-6월 6일+6일까지 약 35만명을 상륙시킨- 은 이제 현대전 특유의 고질적이고도 심각하며 몹시 중요한 한 가지 문제에 직면합니다.

바로 보급입니다.

 

전선이 점점 확대됨에 따라 당시 세계 최초로 100% 차량화를 일구어 낸 미국의 도움을 받는 연합군은 신속한 진격을 위하여 상당량의 가솔린을 필요로 했습니다만 대형 보급선이 들어올 항구가 없었던 관계로, 군용 대형 상륙함과 인공 항구인 '멀베리'를 이용한 보급에 의존해 왔지만 폭풍덕에 멀베리 두 곳 중 한곳이 완파, 나머지 한 곳도 상태가 심각해져 수선이 필요해진 바, 게다가 전선이 벨기에 국경까지 근접한 이상 군용 보급선 같은 소량의 보급은 더 이상 부적절하다는 판단 하, 상륙하고도 몇 일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포위상태였던 코탕텡 반도의 항구, 세르부르를 6월 30일 점령합니다.


 <멀베리의 개념계획도(?)>


사실 계획대로라면 이미 항구 몇 개가 연합군의 손에 떨어져 있어야만 했습니다만 미친듯이 진격하다 진격에 방해가 되는 도시/마을이나 항구은 후발 보병 부대에게 포위를 맏기고 진격하셔 전선의 확대를 부채질한 미국 패튼장군과 북아프리카에서부터 이어진 라이벌 의식이 작용한 영국 몽고메리 장군, 그리고 도저히 질 수 없다는 듯이 나선 미국 브래들리 장군까지 나서 연합군 점령지 내에도 수많은 도이칠란트군 점령 지역이 생겨나 이들이 후에 심각한 골칫거리로 작용하게 만드는 요소들을 남긴 바, 셰르부르가 그 중 가장 대표적인 케이스가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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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노르망디 해안, 드디어 영국군이 무려 2주동안 점령하지 못한 도시, 캉을 미군의 개입 하 점령합니다. 원래 이 지역도 요충지였던 만큼 심각한 전투가 벌어져 사실상 도시 전체가 문자 그대로 초토화될 정도의 피해를 입습니다.

거두절미하고 간단히 말하자면

도시 전체를 통틀어 지어진지 60년 이상 된 건물이 없다시피한 피해

를 입습니다.

그리고 이제부터 영국군은 삽질을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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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맘때쯤 도이칠란트에게 하나의 불벼락이 떨어집니다.

유럽 동부전선, 소련의 146개 소총사단, 43개 기갑사단의 공격으로 중앙집단군 45개 사단 괴멸이라는 싱각한, 사실상 전쟁 수행 능력의 태반을 잃는 대 참사가 일어납니다. 그리고 1942년부터 시작된 스탈린그라드의 도이칠란트 6군의 전투수행능력 상실, 지휘관 파울루스의 항복으로 개시된 소련군의 도이칠란트군 잡아먹기가 더욱 가속화되어 이제 도이칠란트군은 어느 방향에든지 절대로, 다시는 전력을 집중 할 수 없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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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제 보급 문제도 어느 정도 해결되엇다고 생각했던 바, 이제는 내륙지방에 진격을 해야 겠다고 생각했던 바, 노르망디 교통 요지인 '생 로'지역에 진격, 병력 집중, 밀고 밀리는 공방전 끝에 역시 연합군의 사기적인 물량공세 덕분에 도이칠란트군은 결국 7월 19일, 생 로를 내주고 전선에서 후퇴하건 부대마저 제대로 후퇴도 못하고 병목현상으로 사실상 대부분 해안 병력이 괴멸됩니다.

그리고 이제 사실상 없어지다시피/괴멸되다시피한 도이칠란트군 방어병력 덕분에 7월 말, 드디어 코탕텡 반도 등 노르망디 지방을 벗어나 내륙지방에 발을 들여 놓습니다.

그리고 이로써, 작전명 '오버로드'가 종결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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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도이칠란트군은 그토록 분산되고 심각했던 상태에도 불구하고 제법 오랫동안 연합군 병력을 잡아 두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합군은 제법 빨리 내륙으로 진격했습니다.

 

이렇게 상반되는 두 자료를 보아하니 피차 과소/과대평가를 했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럼 다음에는 작전명 버시티와 함께 '묻힌, 잊힌 작전' 이라고 손꼽히는

'작전명 오버로드'의 보조 역할로 수행되었던 '작전명 용기병- Operation Dragoon-'을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아무래도 사실상 묻혔던 작전이었기에 자료 수집이 쉽지 않을 것으로 예상되는 바, 이렇게까지 길 거 같지는 않아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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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롤의 압박은 쓰는 사람을 피곤하게 합니다. 물론 읽는 사람도요.



작전명 밀덕의 혼

2009년 1월 30일 금요일

000. Start.

지금부터 제가 '밀덕'이었다는 신분을 잃지 않기 위한(...이라기보단 사실상의 뻘글)한가지 연재물을 시작합니다.

바로 제 2차 세계대전 중, 1944년 6월 6일부터 개시된 작전명 오버로드, 즉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필두로 개시된 서유럽에서의 미국 육해공군의 본격적인 전투,즉 작전명 버시티, 작전명 마켓-가든 등 작전명이 붙은 전투를 다루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서유럽이냐, 게다가 왜 하필 미군이냐? 하시면서 눈살 찌푸리시는 분 분명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만...

다 아시다시피 제 2차 세계대전의 무대는 유럽 대륙과 태평양입니다. 미국은 그냥 태평양에 접해 있다 뿐이지 본토가 공격당하고 국민 몇%가 죽거나 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참 안타깝게도 2차 세계대전의 주역은 바로 '미국'이였다는 것은 그게 누가 됐건, 저기 지모씨라는 보수꼴통 군사평론가이든 저 D모 사이트의 굽본좌든 사실상의 '모두'가 인정하는 사항입니다...

게다가 아무래도 미국 말고는 그 어떤 나라도 전쟁다운 전쟁을 수행할 능력이 되지를 않았다는 전쟁터였다는 것이...

 

그럼 여기서 잠깐, 혹시 미국이 2차 세계대전에 참가하게 만든 국가가 어느 국가인지 아십니까? 미국이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만든 국가라는게..사실 일본이거든요. 원래 제 2차 세계대전-태평양전쟁에 대해 사실상의 '문외한'에 가까운 것도 그렇고 일본을 어떻게든 다루는게 참 맘에 들지를 않더군요.게다가 한가지 몹시 중요한 이유, 제 전문분야가 2차대전당시 미군이거든요 -ㅅ-;;

 

여하간 이러한 이유에서 미국이 본격적으로 서유럽에 등장하게 된 1944년 6월 6일, 작전명 오버로드-Operation Overload-, 아마도 영원히 깨지지 않을 3대 상륙작전중 하나가 일어난 날, '인류 역사상 가장 길었던 날'을 기점으로 이 연재물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이야기하듯이 풀어쓰는 것인지라 딱딱한 전문 지식(?)은 맨 마지막 혹은 맨 앞에 들어갑니다.이 전문 지식은 작전 전/후의 상황을 알려 주는 것이라 읽으시나 안읽으시나 그만입니다 ^^;

 

※아, 그리고 연재 주기는 일년에 한번이 될 수도 있으니 이점 유념해 주시고...;;[ㅈㅅ..;;]'미 1보병사단 111연대 2대대 2중대 2소대 1분대 제임스병장이 처음으로 교전을 시작했다' 정도로 쓰지는 않을 겁니다. 제겐 그럴 여력도, 시간도 없거니와...그렇게 쓰면 일단 읽는 사람이 지루하거든요.※

-밀덕이라고 모든 밀리터리 분야에 대해 해박한 것은 아닙니다. 저처럼 사실상 야매(?)에 가까운, 말만 밀덕이지 실상은 매니아에 더 가까운 사람들이 더 많거든요.-

 

참고-

그리고 이건 읽기 전 미리 알아두면 편한 부대 편제입니다.

[육군]

집단군

현재는 너무 커서 사용되지 않는 편제입니다.하지만 아작 단대호부호[전술부호라고도 부름니다.]는 존재합니다.당시 약 2-30만명 혹은 그 이상으로 구성되며,

밑에 몇개 '군'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휘 계급은 육군원수[별 다섯개!]혹은 드물게 국가원수입니다.

아무래도 육군원수는 2개국 이상 군대의 합동작전시에만 나타나는 특수 계급 이니 만큼..

어차피 현대전에 없는 크기의 편제이니가요.

 

군

현재는 주로 사령부를 부르는데 사용되는데요,

예하에 몇개 군단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현재도 그런 것 같기도 합니다만 현대전에는 관심이 없어서리...;;

지휘 계급은 대장입니다.[별 네개-]

 

군단

밑에 몇개 사단을 보유하며 편제 지휘관의 권한이 거의 상징적으로 변하기 시작하는 편제입니다. 그러니까 규모는 크면 거의 5만명에도 육박하게 되는 거네요...

지휘 계급은 중장입니다.

 

사단

군단 예하여도 독자행동하는 경우가 큽니다.'편제의 꽃'이라고 불리우며 '장교의 꽃'이라는 소장의 지휘 하에 있습니다.그러니까 사실상 개인이 움직일 수 있는 제일 큰 단위의 편제라고 봐도 무방하네요. 그러니까 박정희 이상의 장군들이 쿠데타를 막지 못한 이유가...이게 되겠내요. 현대에는 8천-1만 5천, 대전 당시에는 1만 5천-2만명 이하로 편성됩니다.

 

여단

사단 예하에선 보기 드문 규모이며 독립된 부대일수도 있습니다.

현대전에서는 3공수여단 5공수여단 이렇게 독자편제 되기도 합니다.

준장의 지휘를 받습니다.

 

연대

사단 소속이 아닌 독립된 부대일수도 있습니다. 대령의 지휘를 받습니다.

 

대대

우리나라 2987부대, 3303부대가 바로 이 대대급입니다.

사단을 한 군데에 몰아 놓으면 안 되니가 제일 적절한 크기로 분산시켜 놓은 거지요..

소령 혹은 중령(?)이 지휘합니다.

 

중대

시가전, 평지전 등 일반적인 전투는 중대단위전투가 대부분인만큼 상당히 중요한 요소입니다. 약 100-200명 사이의 크기로 유지됩니다.

대위가 지휘합니다.변칙적으로 중위가 지휘하기도 합니다만...글쎄요...;;

 

소대

내무반 하나가 소대입니다.

지휘관은 소위 혹은 중위.

그러니까 한 3-40명 정도군요.

 

분대

10-12명으로 이루어집니다.

지휘관은 말년병장,

네, 병장은 10명[포병대] 혹은 12명[보병]의 짱입니다.

 

그리고 이건 좀 변칙적인 경우지만 3-4명 혹은 개인이 편제되거나 중대보다 작으나 소대보다 큰 단위로 편제되어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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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전명 밀덕의 혼, Be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