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2월 5일 목요일

001. 1944. 06. 06. The longest day

삽화를 그려 둔 것이 있기는 합니다만 역시 스캔하기가 귀찮아서[...] 취재한 사진으로 대체합니다.


취재 자료 출처


Salamander社, D-Day

Foreword by Winston S. CHURCHILL


 OPERATION OVERLOAD

from its planning to the Liberation of par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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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대 상륙지역 표시도>


때는 바야흐로 1944년 6월 6일 프랑스 노르망디,

당시 3-4개의 도이칠란트 대서양 방벽 방어사단은 연합군 6개 사단, 3개 여단, 4개 대대병력이 해안으로 물밀듯이 밀려 오는 것을 사실상 지켜만 봐야 했습니다.

그렇게 연합군이 해안 교두보를 세우고 이제 본격적인 '쾌진격'을 시작할 준비를 하고 있었을 무렵,

당시 프랑스에 주둔하고 있던 '연합군 상륙시 즉각 대응이 가능했던' 2개 기갑사단, 1개 기갑군단은 프랑스 레지스탕스들에 의한 보급창고 파괴, 교통로 파괴, 전차장 저격등으로 인하여 아직도 프랑스 도심을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었고

도이칠란트군 지휘부에서는 노르망디 해안에 상륙한 것인지, 칼레 해안에 상륙한 것인지 알지도 못했고, 설령 알았어도 복잡하게 얽히고 설킨 지휘부의 혼재로 인하여 반격의 기회는 커녕 부대를 누가 지휘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상황에 빠져 있었습니다.


<5개의 상륙 후보지,

1. 네덜란드-벨기에 남부 해안지역

2. 파 드 칼레

3. 솜므 강 하구

4. 세느 강 하구

5. 노르망디 해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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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원정군-연합군

총 지휘관-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버나드 몽고메리-영국,캐나다 지상군 총지휘관

오마 브래들리-미국 지상군 총지휘관

배르트람 램지-해군 총지휘관

트래포드 르-말로리-공군 총지휘관

전체 병력

1944년 06월 11일 기준

326.000명

피해 상황

전사 53.700명

부상 155.000명

실종 18.000명

 

제 3제국-도이칠란트

게르트 폰 룬트슈테르-서부지역 총사령관

에르빈 롬멜-B집단군 사령관

전체 병력

미상-약 40만명 가량으로 추정-

피해 상황

전사/사망/실종 약 20만명으로 추정

포로 약 20만명으로 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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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군은 먼저 노르망디 해안을 5개로 분할합니다.

유타, 오마하, 골드, 주노, 스워드.

 

<74, 75쪽>


이런 식으로 분할한 이유는 몇가지가 있겠습니다만 그 중 가장 중요한 한가지를 들자면

바로 지휘의 효율입니다.

어차피 다 같은 연합원정군 소속이지만 연합원정군 맡에만 해도 대체 몇개 군단이...;;

한 명의 장교가 무려 이십만 몇천몇백명 하는 부대를 지휘하는건 나가토 유키가 아닌 이상, 아니 나가토 유키라도 불가능합니다.


-다 아시는 이야기이지만 당시에는 이렇다 할 모니터 달린 퍼스널 컴퓨터가 없었습니다;;-


이래서 이렇게 쪼개 놓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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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디 연합군의 상륙 예정일은 1944년 6월 5일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해안의 기상 악화로 상륙작전이 '무기한' 연기되었고 연합군 사령부는 고심에 빠집니다.

그리고 노르망디 해안에 약 40KM까지 진격한 상륙 선발대를 일시 후퇴시킵니다.

6월 5일을 기점으로 해안의 며칠간 기상이 악화된다는 기상 예보,

하지만 6월 6일 단 하루만큼은 날씨가 살짝 갠다는 예보.

기상 중계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현재의, 지금으로부터 약 60여년 전입니다.

그 조악한 기상 관측 결과 얻어진 꼴랑 '하루' 갠다는 예보를 어떻게 믿고 어떻게 3개 공수사단을 낙하시키고 6개 사단을,3개 여단을, 4개 대대를 상륙시킨다는 말입니까?

하지만 이번 기회를 놓친다면 다시 내년 이맘때 상륙을 개시해야 하고...

그 동안 히틀러가 어떻게든 알아 내고 방어를 강화할테고

혹은 동쪽에서 물밀듯이 밀려 오는 스탈린의 소련군에게 유럽 대륙을 몽땅 빼앗길 테고.

게다가 이탈리아 전선은 이미 고착상태에 빠진 지 오래이고.

결국 연합원정군 총사령관, 드와이트 D.아이젠하워 장군은 위험한 결정을 합니다.

1944년 6월 6일 단 하루가 갠다는 예보, 나는 믿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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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1944년 6월 5일 저녁, 저 유명한 미국 101,82 공수사단, 영국 6 공수사단이 노르망디 해안에 강하, 노르망디 후방을 교란하고 도이칠란트군의 상륙 방어망을 파괴하기 위하여 영국 본토에서 이륙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도버 해협의 연합국 해군의 엄청난 대 함대를 볼 수 있었습니다.


유타

6월 6일 01시 후방에 미국 101, 82 공수사단 강하,

미국 4 보병사단/2, 5 레인저 대대 상륙


오마하

미국 1, 29 보병사단/2 레인저 대대 상륙(예하 8개 중대)


골드

6월 6일 01시를 기해 영국 6 공수사단 강하

영국 50사단/8 기갑여단 상륙


주노

캐나다 3 보병사단/2 가갑여단/영국 48 코만도 대대 상륙


스워드

영국 3 보병사단/27 기갑여단 상륙


<지도 보기 어려워도 익숙해지면 편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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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여기는 도이칠란트군 사령부. 대서양방벽을 방어하고 있는 부대를 지휘해야 하는 에르빈 롬멜, 즉 사막의 여우는 아내 생일이라 잠시 자리를 비웠습니다.

여기서 잠만, 왜 사막의 여우가 사막에 없고 유럽에 왜 있는지는...?

영국 몽고메리+미국 패튼+미국의 물량공세에 밀려 자신이 지휘하던 아프리카군단을, 그 많던 탱크와 보병들을 이집트,튀니지 등등...에서 몽땅 잊어먹고

소수의 병력들과 유럽으로 건너와-사실상 탈출이었죠.- 대서양 방벽을 방어하라는 히틀러의 명령을 받들고 있었죠.


 <그 장대한 대서양 방벽의 일부. 방벽이 뭐 별 거 있나요.

사람/탱크가 못 들어오게 하면 그게 방벽이지.>


그리고 연합군이 실시한 포티튜드 작전,


<포티튜드 작전 수행의 결과 생성된 백괴스러운 괴물체(?)들.

좌상면 탱크, 중간 상륙함, 우하단 트럭>


무전병들이 없는 부대를 거기 있는 마냥 전파를 이리저리 흘리면서 통신을 한다던가 모형 전차들을 때로 만들어 이리저리 세워 놓는다던가 모형 상륙함을 때로 만들어 이리저리 세워 놓는다던가...

이때 롬멜장군을 이리저리 두들겨 패 주셨던 패튼장군님은...

얼마 전의 부하 폭행 사건으로 그 없는 부대의 지휘관을 맡는 수모를 당해 주셨습니다..;;

노르망디가 아닌 큰 부대-패튼 장군의 부대입니다.-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영국 해안과 근접한,

사상 최대의 기만작전이라 불리우는 낚시질로 인해

게다가 가장 상륙하기 편한 칼레 해안에 대충 때려잡아 봐도 약 8개는 넘어가는 숫자의 사단을 집중시켜 두었습니다.


<후에 이 사단들은 도이칠란트군 사령부에 의하여 대다수 현 위치에에 가만히 서 있다가 드디어 실제 존재하는 부대의 지휘를 맡으신 패튼 장군님이 미친듯이-정말 미친듯이 진격했다고 합니다.-달려오시자 별 다른 활동도 못 해보고 사실상 후퇴만 하다가 전쟁 수행 능력을 서서히 잃어가다 걸국에는 괴멸되었습니다.>


하기야 연합군이 코앞에 있는데 아내 생일 축하해 주러 간 롬멜 장군님도 이해가 되는 게 그날 날씨가 안좋아서 설마 상륙이야 하겠나는...그런 생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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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해안을 순찰중이던 도이칠란트군 병사 몇 명은 몹시도 수상해 보이는 새하얀, 그리고 비단으로 만들어진 엄청나게 커다란 천뭉치와 국방색, 카키색의 천뭉치를 여기저기서 발견합니다.

그리고 이 수상한 발견 후

적의 침공이다

를 외치려는 순간, 그들은 자신들이 눈치조차 못 채게 다가와 순식간에 쓰러트리는 카키색 군복의, 심지어 걔들 중 일부는 총도 들고 있지 않던, 오른쪽 팔에 성조기를 단 군인들을 생애 마지막으로 목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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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노르망디 상공의 미군 2개 공수사단은 '살짝 갠 날씨'의 위력을 절실히 느끼고 있었습니다.

자성을 띄지 않게-레이더의 오작동을 막기 위해서였답니다.-칠을 해 놓아 안 그래도 무려 2Kg에 육박하는'철모'의 무게를 더 늘려놓았던데다 위장망, 거기다 무슨 멋에선지 달아놓은 퍼스트 에이드 키트가 그 무게를 엄청나게 늘려주고 있었습니다.


거기다 날이 잘 선 문구용 칼로 자르려고 해도 잘 잘리지 않을 정도로 질기고 두터운 캔버스 천 같은 것으로 만들어진 턱끈이 끊어질 정도로 엄청난 바람과 낙하지역을 찾아는 갔는데 낙하 유도장치 건설에 실패한 패스파인더-Pathfinder, 지상 유도반-들의 활약, 어떻게 알아낸 도이칠란트 대공포대


<비록 당시는 기관충 4문의 쿼드포가 대다수였지만 당시의 조악한 항공기 제작기술이...

게다가 가끔 등장하는 88MM 대공포도 한 몫 단단히 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작전에 처음 투입된 겁에 잔뜩 질린 수송기의 파일럿들, 그리고 어두워서 땅을 확인할 수 없어 아무데나 대충 병사들을 뿌린 항공항해사(?)들의 활약으로 공수부대원들은 이곳 저곳 마치 분무기로 뿌리듯이-원래 예정대로라면 물을 흘리듯이-강하했고, 심지어 같은 항공기에서 강하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무려 10Km나 차이가 날 정도로


-설마 진짜 이러기야 하겠냐만, 이건 실제 참전 병사들의 증언입니다.-


이리저리 정말 제대로 분무되었습니다.

하지만 분무된 와중에도 그들은 서로서로 모여서, 심지어 작전지역이 달랐던 바, 서로 만날 일이 없었던 101사단과 82사단의 중대가 합동으로 작전을 펼치며 자신의 목표물을 부수거나 점거하기 위하여 미친 듯이 노력했고 여기저기 분무된 탓에 강하한 공수부대원들의 규모를 파악하기 어려웠던 도이칠란트군도 결국 분전에 분전을 거듭,


사실상 전투불능상태에 빠집니다.

그리고 상륙 본진이 상륙하려는 무렵, 드디어 각 공수사단들은 각자의 목표를 거의 이루는데 성공합니다.

그리고 한편 영국 6 공수사단은...

주력이 낙하산으로 강하하는 미군 공수부대와는 다른 '글라이더'를 이용하여 강하합니다.

여기서 잠깐, '행글라이더'떠올리시는 분이 많으실 것 같은데 여기서 '글라이더'란 일반적인 서울시내 도로를 굴러다니는 파란색 버스만한, 혹은 지하철 한 량만한-대충 그 크기입니다..;;-날개를 단 나무로 만든 무동력 비행기입니다.

왜 이런 무책임한 방법으로 강하를 시켯는지는 모르겟습니다만 미군도 이걸 쓰기는 썼었습니다. 병력-327 글라이더 연대 같은-을 강하시키는데, 단지 병력뿐만이 아닌 지프나 야포등을 수송하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사실상 비행기로는 수송이 어려운 쇳덩이를 그냥 땅으로 떨어뜨렸다 고장나면 안되니까 나무로 케이스를 만들어 방향만 조정할 수 있게 조타장치 만들어 주고 착륙하다 부서지지 말라고 바퀴 달아주고 수송기 1대 혹은 2대를 이용, 인계철선을 이용해 예인하다 적절한 고도에서 인계철선 끊어 버리고 알아서 착륙하라는, 그런 무책임한 징비 되겠습니다.

이야기가 딴 데로 새버리네요-_-

 

여튼 계속 이어서, 6 공수사단은 그렇게 글라이더를 타고 쿵하고 떨어집니다.

그런데 날씨가 안 좋다고 했었잖아요,

비내린 풀밭에 활공을 하는데 그게 어디 쉽겠습니까...

그래서 강하 도중 목이 부러지고 허리가 부러지고 사람이 튕겨 나가고 고정시켜 놓은 지프기 막 굴러다니고 포탄이 비상 탈출을 하고...

그래서 비단 대공포와 겁에 질린 예인기 파일럿&항공항해사 콤비뿐만이 아닌 이러한 이유로 강하 도중 꽤 피해를 보고...

하지만 영국군은 이런 진리의 안습상황 속에서도 자신들에게 주어진 임무를 모두 수행하고, 이게 서유럽전선(이하 서부전선)에서의 전체 영국군의 사실상 마지막 전과라는 것을 모른 채 그렇게 작전에 성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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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노르망디 해안에서는 상륙 30분만에 70%가 전사한 해안개척대-UDT의 역할을 합니다.-를 따라서 연합군 병력은 해안에 상륙합니다.

그리고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무대가 된 오마하 해변에서는...

A 지역에 갔어야 할 중대가 C지역에 가고 분명히 2차 상륙대와 함께 왔어야 할 본부 구축이 목표인 의무대대-총대신 타이프라이터와 텐트용 천뭉치를 들고 있던-가 주력 공격 팀에 섞여 있는 등... 그리고 조악한 방수천으로 튜브를 만들어 달아 물에 뜨게 만든 27대의 미군 전차-M4 계열의 셔먼전차, 그래도 당시 최신이던.-는 '파도'때문에 단 2대만 살아 남는다던가 해안에서 너무 멀리 출발시킨 수륙양용 전차는 물 속으로 잠수를 하고...


게다가 혼자서 무려 2700킬인지 3000킬인지, 여하간 기관총 쏘다가 한 40여명 타는 상륙정 몇 척을 완전히 쓸어버렸다고 주장을 하던 한 도이칠란트 병사와 하필 밀물이 아닌 썰물때 상륙을 한 통에 뛰어가다 지쳐서 쉬다 총에 맞아 죽을 정도로 길었던 해안.

 

게다가 마침 이 오마하 해변은 도이찰란트군중 정예병이던 무장친위대, Waffen-SS가 지키고 있었는데다 그토록 부족한 도이칠란트의 지뢰, 말뚝 등의 부족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완벽하게 갖춰진 해안 방어시설이...

그러니까 간단하게 비교를 해 보자면 쇠파이프를 든 조폭 때거지 앞에 내던져진 입대(?) 1주일 된 전경 1개 중대 꼴이 되어 버렸다는게 어쩌면 그나마 정확한 비교가 되겠군요...;;

하지만 방어하던 부대가 아무리 정예병이라는 무장친위대라고 해도...

주 해안 방어병력이 칼레 해안에 묶여 있었던 터라 결국 미국의 '물량공세'를 막아내지 못하고 괴멸됩니다.

그리고 다른 해안에서의 상륙은...오마하 다음가는 유타 해변에서의 상륙전은 거의 경미한 저항만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나머지 해안,즉 주노, 소드, 골드에서는 거의 없다시피한 저항 덕에

작전명 오버로드를 통틀어 전사+실종 7만명, 부상자 15만명에 달하는 피해 중

오마하 해변에서만의 피해가 전사, 사망 통틀어 3000명으로

-그리 많지 않다구요? 상륙 직후 단 1시간동안 발생한 사상자의 공식 기록입니다.-

얼마나 극심한 상황이었는지 잘 알게 해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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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사실상의 뻔한 기습공격을 당한 도이칠란트군은 위에서 말했듯이 지휘계통의 혼란, 전투력의 분산으로 인한 실제 전투력의 약화, 그리고 여러 변수들로 인해 사실상의 2차 방어병력은 방어는커녕 제 위치 사수도 못 해냅니다.

일단 프랑스 파리 등지에 주둔하고 있던 2개 기갑사단, 1개 기갑군단. 이들도 SS소속의 정예사단으로 바로 연합군의 상륙 즉시 대응에 나설 사실상 방어 1군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이 연합군의 상륙 소식을 듣고 즉각 출발합니다.

그러나 차라리 안 가느니만 못한 상황이 벌어집니다.

 

바로 후에 '프랑스 국내군'의 칭호를 얻은 프랑스 레지스탕스-마키 단 등 여러 이름이 있습니다만 그냥 통틀어 레지스탕스라고 하겠습니다.-의 저항이 사람 미치도록 만듭니다.

이를테면 길가에 지뢰를 묻어 선두차량을 박살내-탱크 한대 무게 약 30-60T-진격을 방해한다거나 전차장 저격, 길가 부비트랩, 지뢰 덕에 노이로제에 걸린 운전병을 위하여 길가에 접시를 뒤집어 놓는[...]식의 낚시질 등, 그리고 좀 더 적극적으로는 무기고를 폭파한다던가 유류고를 파괴한다던가 교량을 끊는다거나 철로를 파괴한다던가-후에 연합군의 사용이 난감할 정도로 심각하게 파괴했다고 합니다.-직접 교전을 벌여 피해를 입힌다거나..

 

그래서 '정예' 2개 기갑사단 1개 기갑군단은 해안까지 가는데도 무시하지 못할 수준의 피해를 입고 이미 연합군 상륙 2군이 거점을 완전히 장악하여 이제는 도버 해협에 쓸어넣을 생각도 못 할 즈음, 노르망디 지역의 교통 요지인 '생 로'지역에서 더 이상의 진격은 소용이 없다는 것을 느낀 것인지 진격을 멈추고 연합군이 '생 로' 지역에 오기만을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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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편 상륙에 성공한 연합군-6월 6일+6일까지 약 35만명을 상륙시킨- 은 이제 현대전 특유의 고질적이고도 심각하며 몹시 중요한 한 가지 문제에 직면합니다.

바로 보급입니다.

 

전선이 점점 확대됨에 따라 당시 세계 최초로 100% 차량화를 일구어 낸 미국의 도움을 받는 연합군은 신속한 진격을 위하여 상당량의 가솔린을 필요로 했습니다만 대형 보급선이 들어올 항구가 없었던 관계로, 군용 대형 상륙함과 인공 항구인 '멀베리'를 이용한 보급에 의존해 왔지만 폭풍덕에 멀베리 두 곳 중 한곳이 완파, 나머지 한 곳도 상태가 심각해져 수선이 필요해진 바, 게다가 전선이 벨기에 국경까지 근접한 이상 군용 보급선 같은 소량의 보급은 더 이상 부적절하다는 판단 하, 상륙하고도 몇 일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포위상태였던 코탕텡 반도의 항구, 세르부르를 6월 30일 점령합니다.


 <멀베리의 개념계획도(?)>


사실 계획대로라면 이미 항구 몇 개가 연합군의 손에 떨어져 있어야만 했습니다만 미친듯이 진격하다 진격에 방해가 되는 도시/마을이나 항구은 후발 보병 부대에게 포위를 맏기고 진격하셔 전선의 확대를 부채질한 미국 패튼장군과 북아프리카에서부터 이어진 라이벌 의식이 작용한 영국 몽고메리 장군, 그리고 도저히 질 수 없다는 듯이 나선 미국 브래들리 장군까지 나서 연합군 점령지 내에도 수많은 도이칠란트군 점령 지역이 생겨나 이들이 후에 심각한 골칫거리로 작용하게 만드는 요소들을 남긴 바, 셰르부르가 그 중 가장 대표적인 케이스가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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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노르망디 해안, 드디어 영국군이 무려 2주동안 점령하지 못한 도시, 캉을 미군의 개입 하 점령합니다. 원래 이 지역도 요충지였던 만큼 심각한 전투가 벌어져 사실상 도시 전체가 문자 그대로 초토화될 정도의 피해를 입습니다.

거두절미하고 간단히 말하자면

도시 전체를 통틀어 지어진지 60년 이상 된 건물이 없다시피한 피해

를 입습니다.

그리고 이제부터 영국군은 삽질을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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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맘때쯤 도이칠란트에게 하나의 불벼락이 떨어집니다.

유럽 동부전선, 소련의 146개 소총사단, 43개 기갑사단의 공격으로 중앙집단군 45개 사단 괴멸이라는 싱각한, 사실상 전쟁 수행 능력의 태반을 잃는 대 참사가 일어납니다. 그리고 1942년부터 시작된 스탈린그라드의 도이칠란트 6군의 전투수행능력 상실, 지휘관 파울루스의 항복으로 개시된 소련군의 도이칠란트군 잡아먹기가 더욱 가속화되어 이제 도이칠란트군은 어느 방향에든지 절대로, 다시는 전력을 집중 할 수 없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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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제 보급 문제도 어느 정도 해결되엇다고 생각했던 바, 이제는 내륙지방에 진격을 해야 겠다고 생각했던 바, 노르망디 교통 요지인 '생 로'지역에 진격, 병력 집중, 밀고 밀리는 공방전 끝에 역시 연합군의 사기적인 물량공세 덕분에 도이칠란트군은 결국 7월 19일, 생 로를 내주고 전선에서 후퇴하건 부대마저 제대로 후퇴도 못하고 병목현상으로 사실상 대부분 해안 병력이 괴멸됩니다.

그리고 이제 사실상 없어지다시피/괴멸되다시피한 도이칠란트군 방어병력 덕분에 7월 말, 드디어 코탕텡 반도 등 노르망디 지방을 벗어나 내륙지방에 발을 들여 놓습니다.

그리고 이로써, 작전명 '오버로드'가 종결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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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도이칠란트군은 그토록 분산되고 심각했던 상태에도 불구하고 제법 오랫동안 연합군 병력을 잡아 두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합군은 제법 빨리 내륙으로 진격했습니다.

 

이렇게 상반되는 두 자료를 보아하니 피차 과소/과대평가를 했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럼 다음에는 작전명 버시티와 함께 '묻힌, 잊힌 작전' 이라고 손꼽히는

'작전명 오버로드'의 보조 역할로 수행되었던 '작전명 용기병- Operation Dragoon-'을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아무래도 사실상 묻혔던 작전이었기에 자료 수집이 쉽지 않을 것으로 예상되는 바, 이렇게까지 길 거 같지는 않아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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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롤의 압박은 쓰는 사람을 피곤하게 합니다. 물론 읽는 사람도요.



작전명 밀덕의 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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