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6월 18일 목요일

002. 1944. 08. 15. Mission for Our Future

-001. 1944. 06. 06. The longest day에 이어서 연재합니다.-

그런데 2009년 02월 11일 작성되었던 1편에 비해...
연재 주기가 그야말로 충격과 공포입니다[...]
그런다고 자료 수집에 시간이 기하급수적으로 걸린 것인가...아닙니다.
그러면 그저 궈찮아서 밀린 것이냐...이것도 아닙니다.
그저 잊어먹었을 뿐.
[...그냥 나가 죽어라 ┓-]
일단 서장의 잡설은 때려 치고(?) 바로 들어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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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8월 15일, 당시 도이칠란트군 점령 하에 있던 프랑스 남부 지역에 연합군의 침공이 이루어졌습니다. 이 작전으로 연합군은 캉과 툴롱 사이의 지역을 탈환하는데 성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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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전명 용기병-Operation Dragoon-의 초기 작전명은 모루-Operation Anvil-였습니다.

원디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작전명은 ‘망치’였습니다.
즉 대장간에서 모루에 쇠를 올려놓고 망치로 두들기는 식으로 도이칠란트군을 양쪽에서 격파한다는 의미였습니다.
그런데 왠지 좀 망치하고 모루 하면 좀 충공그깽이 아니어 보인건지 어쩐건지[...] 여튼간 두 작전 모두 작전명을 바꿨습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은 ‘절대군주’
-원래 과적 등의 뜻을 가진 Overload였지만, 이 작전에서는 군주를 넘는다[...]로써 절대군주로 해석된 듯 합니다.-
로 변경하였고, 이에 따라 작전명 모루의 경우 ‘작전명 용기병(작전명 龍騎兵, Operation Dragoon)’으로 바꿨습니다.
이 작전명은 작전을 제의한 영국의 윈스턴 처칠-이하 처칠- 수상이 지었다고는 하는데...
이는 나중에 훼이크임이 밝혀졌습니다[...어째서??]

처칠은 작전명 용기병이 발칸 반도, 그리고 가능하다면 여타 동유럽 국가들의 석유 생산 지역에 대한 침공에 사용되는 것이 더 나을 전력을 빠가는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즉, 그 전력이 동유럽의 석유 생산 지역에 대한 침공에 사용될 경우 도이칠란트가 전쟁에 필요로 하는 석유의 확보에 악영향을 줄 것이며...
-당시 도이칠란트는 일찍이 발칸 반도를 맛있게 먹어 치운 상태였습니다. 제 블로그의 이 포스트에서 직접적으로는 아니지만 문맥상 잠깐 언급된 바 있습니다.-
...아니 그냥 이 지역을 도이칠란트에게서 뺏어서 소련이 앞질러 점령하는 것을 예방함으로써 제2차 세계대전 후에 이어질 평화기에 서유럽을 위한 더 나은 상황을 조성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한 마디로 줄여 말하자면 벌써부터 냉전의 싹이 보입니다.

그러니까 바르샤바 조약기구 같은 것이 만들어짐을 방지할 뿐만 아니라, 동유럽을 소련에 대한 견제세력으로 형성함으로써 소련의 침공으로부터 서유럽을 보호한다는 소리입니다.
여하간 이 망할 자본주의 친인척들 같으니라고-ㅅ-

...여튼간 이리저리 잡설로 얼룩진 초반 내용은 이제 접어 두고 본론으로 넘어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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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프랑스 군과 미군으로 이루어진 혼성부대가 툴롱과 마르세이유, 두 항구도시는 물론이거니와 프랑스 남부의 휴양도시 생 트로페까지 점령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작전입니다.
1944년 내내 재검토된 이 작전은 연합군의 전력을 이탈리아 전선에 계속 투입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영국군 수뇌부와 연합군의 후원자이기도 한 미군 수뇌부 사이에서의 갈등을 초래했다. 이는 영국과 미국의 거대한 전략적 불일치의 한 사례이기도 했습니다.

1944년 6월 초의 로마 함락과 함께 계속 해안에서만 밍기적거리던-이라기보단 영국군 크리ㅠㅠ-연합군은 드디어 노르망디 교두보로부터 진격해 나가는 작전인 작전명 코브라-Operation Cobra-가 성공하자 용기병 작전도 탄력을 받았습니다. 이로써 용기병 작전의 D-Day는 1944년 8월 15일로 정해졌습니다.

이에 따라 미육군 6군단 사령부, 7군 사령부와 훗날 프랑스 육군 제1군이 되는 자유 프랑스 육군 제B군 및 제1군단과 제2군단, 그리고 제51야전병원이 이 작전 과정에서 편성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작전계획에 따라 자유 프랑스 군과 미군을 합체(?)하기 위하여 용기병 작전을 실시할 전력의 일부인 미육군 제6군은 제이콥 L. 디버스 중장의 지휘 하, 1944년 8월 1일 코르시카 섬에서 출발합니다. 이 작전의 초반은 지중해 지역 연합군 사령관인 헨리 메이틀랜드 윌슨 경이 담당하였습니다. 하지만 작전이 개시된 후 한 달 뒤, 지휘권은 서유럽지역 연합군 총사령관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장군이 지휘하는 연합군 최고사령부 관할로 넘어갔습니다.

공격부대는 미군 제6군단 예하 3개 사단들로 이루어졌으며,
여기에 자유 프랑스 군의 기갑사단이 편성되었습니다.

상륙 지역과 각 부대명은 아래와 같습니다.
3사단-프랑스 카발레어 수르 메르, 코드명 알파 해안 -Alpha Beach-
45사단-생 트로페, 델타 해안 -Delta Beach-
36사단-생 라파엘 오른쪽(?), 카멜 해안 -Camel Besch-
93야전병원-생 맥심 -H-6
위와 같습니다.


또한 이 작전이 있기에 앞서 작전명 로미오-Operation Romeo-에 따라 자유 프랑스 특수부대가 주 공격 축의 서쪽에 있던 니그레 곶에 배치된 도이칠란트군의 해안 포대를 파괴하기 위해 상륙했습니다.
이 부대는 양쪽 측면에 상륙한 또 다른 자유 프랑스 특수부대들과 1공수임무부대의 증원을 받았습니다.

-1공수임무부대, 1st Airborne Task Force...?
1공수임무부대는 예하
영국군 2독립공수여단
미군 517공수연대, 미군 509독립공수대대와, 550 글라이더 독립공수대대, 1대대, 551공수독립연대로 이루어진 글라이더 공수부대로 편성되었습니다.-

참고로 1공수임무부대의 지원 작전은 작전명 비둘기-Operation Dove-라 합니다.
그리고 작전명 시트카-Operation Sitka-의 수행 결과로써 확보된 교두보의 보호를 위한 해안 근처의 두 섬을 점령하는 작전이 1공수임무부대에 의해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포티튜드 작전과 같은 기만작전인 경간작전-Operation Span, 여기에서 경간이란 두 개 다리 교각의 사이 거리를 의미합니다.-이 실시되어 도이칠란트군을 낚았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덧붙여서 자유 프랑스 해군 소속 전함 로레인과 영국 전함 레밀리에스, 미국 전함 텍사스, 네바다, 아칸소와 50척 이상의 순양함 및 구축함을 비롯한 연합군 함선들로부터의 함포사격이 상륙작전을 엄호했습니다. 여기 더하여 7척의 연합군 호위항모-항모와는 다릅니다 항모와는...!!-가 제공권을 확보해주었습니다.

작전 결과 9만 4천 명 이상의 병력, 1만 1천 대 이상의 차량이 상륙 개시일에 상륙했습니다.
이 당시 프랑스에 주둔 중이던 상당수의 도이칠란트군 병력은 작전명 오버로드 이후 이후 프랑스 북부지역에서 연합군을 막는데 모든 전력을 기울이던 상태였으며, 이외에도 OSS(미국정보국, CIA의 전신) 소속 아론 뱅크 대위의 지원을 받고 있던 프랑스 국내군-한 마디로 레지스탕스-에 의해 공격이 이루어짐으로써 도이칠란트군은 알프스의 로마군 꼴이 나고 말았습니다. ㅎㄷㄷ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연합군은 내륙으로 진격했습니다. 그리고 내륙으로 들어가면서 프랑스 국내군과 합류했습니다. 24시간동안 무려 20마일을 진격해 들어간 것이 노르망디 상륙작전과 절묘하게 맞물리면서 연합군은 대성공을 거두었으며 파리에서 프랑스 국내군이 봉기를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한편 도이칠란트 9군의 빠른 후퇴는 연합군의 작전 성공 요인 중 하나였습니다. 오죽하면 도이칠란트군의 저항보다 진격하는 부대의 차량에 연료를 공급하는 문제가 작전에 있어 더 큰 장애요인
-이 문제는 노르망디에 상륙한 연합군도 같은 문제로 상당한 골머리를 썩히고 있었습니다.
현대전에 있어 석유란, 금보다 중요합니다 ㄷㄷㄷ-
으로 떠오르는 상태였습니다. 여하간 이 문제 같지도 않은 백괴스러운 문제 덕분에 도이칠란트군 잔존병력이 프랑스의 보주 산맥, 심지어 도이칠란트로 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9월 중순, 작전명 용기병에 참가한 모 부대는 작전명 오버로드에 참가한 부대 중 남쪽으로 진격한 부대와 디종에서 상봉하였습니다. 그런데 눈물은 안 흘렸다나봐요. 남희석은 당연히 없었고요[........썰렁]
 
여하간 이 작전명 용기병으로써 예상되던 효과는 바로 마르세이유 항의 사용이었습니다.
작전명 코브라와 작전명 용기병 이후 연합군의 신속한 진격은 보급의 부실함으로 인하여 1944년 9월부터 거의 중단되다시피 할 정도로 느려졌습니다.

이에는 패튼 장군과 몽고메리 장군의 경쟁으로 인한 무리한 전선 확대
-무리한 전선 확대로 인해 도이칠란트군 저항지를 지나쳐가며 진격을 하여 공식적으로는 연합군 점령지역인데 이 안에서 도이칠란트군 잔존병력이 남아 저항을 하는 등[...]-
노르망디 상륙작전 전에 이루어진 연합군의 폭격으로 인한 육상 운송시설의 부족
상륙작전 후 도이칠란트군의 항구 파괴, 이로 인한 유럽 북부지역의 항구 시설의 부족

이러한 이유로써 상당한 공백이 발생한 보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엄청난 양의 보급물자가 프랑스 남서부 지역으로 유럽 대륙에 보급될 것이엇습니다.
한 편, 마르세이유 항구와 프랑스 남부지역의 철도는 심란할 정도로 파괴되었지만 상륙 직후 신속히 복구되었습니다.

결국 작전 결과, 도이칠란트와의 전쟁에 있어 연합군이 필요로 하던 보급물자의 약 3분의 1을 지원해줄 수 있었을 정도였습니다. 즉, 전체 결과를 종합해 보면 작전은 모두 성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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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다음 3부로는...
바로 1944년 12월에 벌어졌던 히틀러의 마지막 저항,
바스토뉴 숲의 벌지 전투에 대하여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아무래도 시험기간 크리-7월 2일부터 고사 시작 ㄷㄷㄷ-가 겹쳐시간 순으로 작전을 알아내 정리하는데 심각한 문제가 생겨서 말입니다 ;ㅅ;

실은 3부로는 작전명 오버로드와 작전명 용기병 중 개시된 작전
-위쪽의 작전명 코브라라던가 작전명 포티튜드라던가...-
들을 '간략하게' 다루려고 했습니다.

그런데...그게 자료 수집에 천문학적인 시간이 걸릴 듯 하고, 무엇보다 국내에서는 이런 작전에 대한 자료를 구하기 어려워 해외 사이트까지 들낙날락 해야 할 것으로 예상되므로....아아;ㅅ;


작전명 밀덕의 혼

댓글 2개:

  1. @.@ 여러 자료 수집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셨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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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영민C - 2009/06/20 08:58
    좋아하니까 이럴 수 있는 거죠 ㅋㅋㅋ;;

    글솜씨가 딸려서 더 매끄럽게 쓰지 못 하는게 그저 안타깝습니다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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