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0월 3일 토요일

004. 1944. 09. 17. Fight for Our Conceit

-003. 1944. 12. 16. His last resistance에 이어서 연재합니다.-

3편에서 예고한 바와 같이 이번에는 마켓-가든 작전입니다.
마켓가든 작전이 아니라 마켓-가든 작전입니다. 왜 마켓-가든 작전인지는 잠시 후 설명하겠습니다.

이 마켓-가든 작전이란...
여러모로 영국군 이하 여러 연합국이 너무 자만했던 바, 결국 08%의 성공을 거둔 작전입니다.

-왜 08%냐 하면... 본 작전이 종결되고 연합국 수뇌부가 말하기를, '본 작전은 80%의 성공을 거두었다'고 했는데 80%는 개뿔-ㅅ- -

간단히 비교를 하자면 후일 베트남 전쟁의 예고편을 찍었다고 하면 편하다고 봐야 할 까요.
애시당초 그 쪽은 참 무익한 이념싸움이라 딱히 비교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합니다만, 그래도 왠지 양상이 비스무리하여 비교를 해 보려고 해도 딱히 비교를 할 기분이 들지를 않는군요.

그때는 60년대고 다루려는 내용은 40년대니까[...]

여하튼, 시작합니다.

연합군의 파리 점령 이후, 유럽 서부전선은 사실상 광란의 진격의 대명사, 패튼 장군과 그의 강력한 라이벌 몽고메리 장군의 빠와로 인하여 거진 도이칠란트 쪽으로 이동했습니다. 팔레즈 포위망에서 괴멸적인 타격을 입은 서부 전선의 도이칠란트군은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원수를 다시 서부 전선 도이칠란트군 지휘관으로 재사용하는 등 필사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전선은 결국 네덜란드까지 물러난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연합군의 진격이 멈췄습니다?

그 이유라 함은...

<출처는 여기. 줄줄줄줄 쓰기 귀차나요;ㅅ;>

이전에도 몇 차례를 이야기 한 바 있는 보급 문제입니다.
특히 완전 공업화 된 미국 쇼미더머니의 포스 아닌 포스로 100% 차량화 되다시피 한 연합군에게는 더더욱 그랬습니다.

그나마 좀 남아 있던 북프랑스의 항구들은 철수하는 도이칠란트군이 철저하게 파괴 공작을 벌이는 바람에 당장 쓸 수 없는 상황이었고, 유일한 항구는 노르망디 해안[...]뿐이었습니다.
그리고 패튼장군 특유의 진격교리, 즉 자신의 기갑부대는 광란의 질주를 벌이지만 중간에 귀찮은 도이칠란트 군의 점령지가 등장하면 후속 보병부대에게 포위섬멸 임무를 하달하고 또다시 광란의 질주[...]

이 뿐만 아니라 유럽 대륙 내의 수송망의 상황도 안습일로를 달리고 있었습니다.
가장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던 프랑스의 철도망은 4년 간의 도이칠란트 점령 기간 중 프랑스 레지스탕스의 파괴공작을 필두로 하는 교통망 파괴작전+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위한 연합군 공군의 후방 차단 작전+철수하는 도이칠란트의 파괴 공작으로 이게 철도였는지 그냥 쇠막대기 두 개 놓고 그 아래에 나무판자 많이 깔아 놓은 것인지 분간이 안 가게 되었습니다.

결국 노르망디 해안의 후방 보급대부터 최전방 부대까지 사실상 모든 보급은 '레드볼 익스프레스'라 불리우는, 흑인 운전병의 특별 보급대에 의존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최전방 부대-역시 패튼과 몽고메리네. 여기에 꼽사리 낀 미국 브래들리네 부대까지 OTL-가 점점 노르망디 해안에서 멀어지는 바람에 수송대 자체가 소비하는 연료만도 감당할 게 못되어 가서-한 마디로, 배송료가 너무 비싸서- 결국 진격이 멈췄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사실은 당시 도이칠란트 군은 꼬리 말고 도망치기 바빠서 반격할 여유가 없었던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랄까요.
만약 히틀러가 꿈을 좀만 더 일찍 꿨더라면 정말 히틀러가 꿈 꾼 대로 될 뻔했습니다.

그리고 결국 싸움도 없고 심심한 연합군 수뇌부에서는 밥그릇 싸움이 일어나기 전의 상황이 되었습니다.
보급 우선 순위를 놓고 미국과 영국의 지상군 지휘관들 사이에서 갈등과 반목이...
북아프리카에서부터 보인 양군 지휘관들의 경쟁과 알력은 이 시기에 보급 문제를 둘러싸고 폭발 일보 직전까지 치닫았습니다.

한 편, 프랑스에서 도이칠란트군의 급격한 후퇴와 괴멸은 연합군 수뇌부를 들뜨게 했습니다.
심지어 이제 잔존한 도이칠란트군 전력은 자전거만 가진 소년병과 늙은 병사들 뿐이라는 낙관적인 추정까지 나왔습니다.
오죽하면 1944년 12월 25일을 각 병사의 집에서 보낼 수 있을 것이라는 말까지 나왔으니 말 다 했습니다.

게다가 이렇게 도이칠란트군이 안습해 할 때 몰아붙이면 쉽게 전쟁을 끝낼 수 있을 것이라는 낙관적 전망이 연합군 수뇌부의 전반적인 생각이었습니다.
그리고 노르망디 상륙 작전 이후 후방에서 휴식과 재편성 등 재정비 작업만 해온 공수부대 전력-이라기보단 간지폭풍 대량공수대낮에 보고 싶어서?-을  활용하고 싶어하는 지휘관들의 소망도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영국군 버나드 몽고메리 원수가 이 작전을 계획했습니다.

그런데 이 작전의 기획자가 지구방위대 미군의 아이젠하워가 아니라 영국군 몽고메리입니다?

왜 그런고 하니...
지금 영국군 상황은 별 공적도 세우지 못 한 참 안습한 부대의 전형으로,
작전명 오버로드 당시 캉 지구에서 무려 2주간 지지부진하다 미군이 도우러 오자 그제서야 점령에 성공한 가슴아픈 과거(?)를 가지고 있었던 것도 있고 제시한 바와 같이 정말 공적 하나 없이 지지부진한 자기 공훈 좀 세우려고영국군 사기를 좀 올려 주고 싶어서 이 작전을 기획했다는 성격이 큽니다.

마켓-가든 작전 계획

바다보다 낮은 네덜란드에는 라인 강이 흐르고 이 라인 강을 비롯한 뫼즈 강, 발 강에는 7개의 다리가 있습니다. 연합군의 계획은 바로 이 7개의 다리에 공수부대 병력을 투입, 다리를 점거한 후,
지상군이 투입되어 네덜란드의 제방을 지나 네덜란드 방어선과 라인 강을 돌파해 바로 도이칠란트 본토로 진입한다는 작전입니다
만약 이 작전이 성공한다면 크리스마스 전까진 전쟁을 끝낼 수 있을 거라는 것이 연합군의 계산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작전은 2개의 작전으로 구성되었습니다.

마켓, MARKET
1 연합공수군은 브라우닝 장군의 지휘를 받아 가든 작전이 개시되기 전까지 다리와 핵심 지역을 장악한다.

미국 101 공수사단 - 아인트호벤
미국 82 공수사단 - 니이메헨
영국 1 공수사단 - 아른헴
자유 폴란드 공수여단 - 약 1천명 가량의 지원부대

가든, GARDEN

영국 2 군의 지상군은 브라이언 호록스 장군의 영국 30군단을 내세워 마켓의 결과로 확보한 진격로를 따라 북쪽으로 진격.

연합군은 이 부대들로 3일 이내로 라인 강을 모두 확보, 돌파해야 하며 이 작전의 성공을 위해 공수부대가 투입될 지역엔 도이칠란트군 기갑부대가 없어야 한다는 전제 조건이 필요했습니다.
왜냐, 공수부대의 대전차장비란
대전차총, 박격포, 바주카포, 대전차수류탄, 지뢰, 소구경의 야포, 육탄 수류탄 돌진[...]과 같은
지국히 한정된 물건밖에 없으니까.

-탱크를 잡는데에는 탱크가 필요하지만 공수부대에게는 그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 작전은 9월 17일, 일요일 대낮에 개시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작전 시작!

드디어 1944년 9월 17일 일요일 오전, 병력 3만 5천여 명, 340문의 휴대용 야포 및 화포, 500여 대 가량의 각종 지프 및 소형 차량과 기타 장비, 해서 600여 톤 규모의 물자를 적재한 수송기와 글라이더가 영국 각지의 비행장에서 이륙하는 것으로 영국군 주도의 장대한 삽질크리는 막을 올립니다.

일단 1차로 시작되는 작전인 공수점령작전, 마켓의 규모로는 해안 후방 지대에 강하하는 작전명 오버로드보다 훨씬 규모가 큰 작전입니다. 아무래도 네덜란드 전 역에 걸쳐 강하하는 것이니 말 다 했죠 뭐.

그러나 작전 초기, 수송기의 고장 등으로 일부 기체가 영국, 또는 인근 연합군 비행장으로 복귀했습니다. 게다가 대낮에 강하를 했으니 도이칠란트 대공포대에게 좋ㅋ은ㅋ표ㅋ적ㅋ이 되었으며, 기타 날다가도 지들끼리 부딪혀 요단강 너머로 날아가거나 등등등[...]

여튼간 오후 2시 15분, 벨기에 - 네덜란드 국경선에서 대기 중이던 영국 30군단이 네덜란드로 진격을 개시했습니다.
그리고 지상군 또한 작전 초부터 도이칠란트군의 대전차포 공격에 발이 묶였습니다.
아무래도 네덜란드의 길이란 서울특별시 강남구 압구정동 8차선도로 같은 것이 아니라 한강변 자전거 4차선도로(...뭐지 이 비유는?) 같은, 그야말로 산 속 오솔길이 대부분이라 맨 앞을 가던 탱크 한 대만 때려 잡아도 바로 길이 막혀 버리기 십상입니다.
그런데 이런 거 생각 안 하고 근 5만명 가량을 때려 박으니 그 결과는 불 보듯 뻔하죠[...]

하여간 먼저 아인트호벤에 미국 101 공수사단이 강하합니다.
역시 미 육군 최초로 최고의 부대기장을 수여받은 부대답게 이들은 다리 하나를 점령하는 데 성공하지만 간발의 차이로 점령해야 했던 다리 하나를 도이칠란트군이 눈앞에서 요단강 너머로 날려 보내는 것을 보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현재 전 세계에서 유일하다시피 남아 있는 최고의 낙하산 강하부대인 미국 82 공수사단이 니이메헨에 강하합니다.
하지만 이들이 다리를 점령하기도 전에 도이칠란트군이 선수를 쳐 다리를 장악합니다.
결국 발 강의 다리를 두고 전선이 형성되었습니다.

한 편, 아른헴에 투입된 영국 제1 공수사단의 경우는 매우 심각했습니다.
이들이 강하한 아른헴 주변엔 연합군이 그 존재를 애써 무시하고 있던 도이칠란트 기갑사단이 배치되어 있어서 순식간에 전장의 폭풍에 휩쓸렸습니다.
그러나 이 기갑사단에 방법당했다는 것은 영국이 패배를 감추기 위한 핑계일 뿐이었으며, 실제 기갑사단들은 1개 보병사단만도 못한 전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작전 초반, 이들을 외부와 연결해 줄 통신트럭 두 대가 감쪽같이 증발하면서 이들은 순수히 자신들의 능력만으로 이 곳에서 살아 가야 할 상황에 처하고 맙니다.

이건 여담입니다만, 이 실종된 두 대의 통신차량은 정말로 말이 많습니다.
실종된 원인이 몇 가지 있습니다만, 가장 대표적인 것을 들자면

1. 글라이더로 강하하다 숲속에 추락해 아무도 살아나가지 못했고 아직까지 그들의 시신을 발견하지 못했다
2. 글라이더째로 늪지대에 쳐박았다, 물론 아무도 살아나가지 못했다.
3. 현지 주민들에게 트럭 부속품까지 소멸당했다
4. 트럭 운용병들이 쓱싹 해 먹고 날랐다

2차대전 중 가장 대표적인 미스테리로 손꼽히는 미스테리입니다.
다른 미스테리는...음...몰라요 저도[...]

하여간 이 지역에 주둔하고 있던 기갑사단은 9 SS기갑사단 호헨슈타우펜과 10 SS기갑사단 프룬츠베르크인데 이 중 9 SS기갑사단은 쓸만한 전력은 모두 프룬츠베르크에 넘겨주고 도이칠란트 본토로 이동하여 재편성 예정이라 주력인 19, 20 SS 기갑척탄병 연대는 합쳐서 2개 중대에 불과했습니다.
또 사단 포병 연대는 야포가 없어서[...] 그냥 보병으로 싸웠고, 기갑 전력도 판터 3대와 4호 구축전차-전차 잡는데 쓰는 전차랄 것도 없는 잡것?-2대가 전부였으며 예하 공병대대, 대공포대대 등도 말이 대대지 실은 한 개 중대급도 안되었습니다.

그나마 조금 사정이 나았던 9 SS 기갑수색대대는 마켓가든 작전 당일 도이칠란트로 향하는 화차에 적재되고 있었고 결국 다 합해봐야 사단 총원은 3천 명 이하로서 기갑사단은커녕 연대 전투단 수준이었습니다.
역시 10 SS 기갑사단도 9 SS 기갑사단의 인력과 장비를 넘겨받았지만 워낙 프랑스에서 포위-퇴각전 중에 큰 피해를 입어 축소된 편제에도 한참 부족했고, 그나마 괜찮은 전력이던 하인케 전투단, KG Heinke은 아헨-후일 결국 연합군이 최초로 진입한 도이칠란트 본토-의 위기가 급하다고 차출된 상태라 재정비가 시급한 보병 사단 수준도 되지 않았습니다.

다만, 존 프로스트 중령이 지휘하는 제2대대가 아른헴 대교의 입구를 장악하면서 도이칠란트군의 추가 투입을 방해했지만, 도이칠란트군이 주변에서 투입 가능한 모든 전투 병력을 다급히 투입하고 사단 주력은 다리에 접근하지도 못한 채 마구잡이로 싸우는 상황에서 아른헴 다리 입구 장악은 그다지 의미가 없었습니다.

결국 9월 18일 오후, 작전 예정 시간보다 24시간을 초과한 상태에서 영국 30군단이 아인트호벤에 도달합니다. 그러나 전날 미국 101 공수사단이 장악하지 못하고 폭파당한 다리가 복구되지 못했기 때문에 다시 후방에서 가교를 들고 와야 해서 많은 시간을 허비했습니다.
여기에 다시 네이메헌까지 진격하는 데 도이칠란트군의 대전차 공격으로 다시 많은 시간을 허비합니다.
결국 영국 30군단은 예정 시간보다 70시간을 초과해 9월 19일, 니이메헨에 도달합니다.

그러나 다리는 아직까지 도이칠란트군이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9월 18일, 아른헴 대교 입구를 방어하고 있던 프로스트 중령의 2대대는 도이칠란트 10 SS 기갑사단의 공격을 받고 있었습니다.
장갑차를 앞세우며 공격해 오는 도이칠란트군은 사단 예하 기갑수색대대인 그로텍 전투단이었고, 영국군은 피아트 대전차 로켓포를 쏘아대며 대항합니다. 결국 장갑차가 격파되면서 다리를 막아 도이칠란트군은 더 이상의 장갑차량을 다리 건너로 보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른험 시내에서는 영국 1 공수사단의 주력 부대가 혼전 상황에 빠졌고, 이에 따라 사단과 대대 간의 통신은 거의 두절 상태가 되고 있었습니다.

9월 19일, 아른헴 대교 반대편의 도이칠란트군은 영국군이 더 이상 항복할 것 같지 않자 영국군이 엄폐해 있을 것 같은 민가에 대해 무차별 포격을 퍼붓습니다. 이 포격에 영국군 대대 병력이 괴멸적인 타격을 입음으로써 더이상 영국군은 사실상 모든 전투력을 날려먹습니다.
그러나 전날 다리 한가운데에서 파괴된 장갑차로 인해 도이칠란트군은 다리 건너로 병력을 추진할 수 없었습니다.

이제 신속히 30군단이 도착하지 않는다면, 영국 1 공수사단은 결국 괴멸되고 말 것입니다!

9월 19일, 네이메헌의 30군단은 다리를 돌파할 방법을 모색하나 마땅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결국 미국 82 공수사단이 강을 우회하여 후방에서 끌고 온 보트로 강을 도하, 다시 교량쪽으로 이동해 다리를 점거한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9월 20일, 미국 82 공수사단은 보트를 지원받았지만 그 수량이 매우 적었고 예정했던 시간보다 너무 늦었습니다.
그러나 공수부대원들은 이런 상황에서 포기하지 않고 강을 건너고자 하여, 오후 3시에 도하를 개시, 도이칠란트군의 탄막으로 인해 많은 장병들이 물 속으로 사라져 갑니다.
그리고 도하가 시작된 지 얼마 안되어 강 반대편으로 병사들이 상륙에 성공해 다리를 점거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미 예정 시간을 훨씬 뛰어 넘었기 때문에 작전은 이 시점에서 실패한 것이나 다름 없게 되었습니다.

결국 9월 20일 저녁, 마침내 아른헴 대교에서 프로스트 중령의 2대대가 와해되어 아른헴 대교에서 퇴각하게 됩니다.
이와 동시에 영국 1 공수사단도 철수를 개시해 9월 21일엔 아른험을 떠나 오스테르베이크로 퇴각합니다.
이 날, 스타니슬라프 소사보브스키 장군의 자유 폴란드 공수여단이 영국 공수부대를 지원하기 위해 아른헴 지구에 투입됩니다.
하지만 이들의 세력은 워낙 미미해 곧장 영국군과 같은 처지에 놓이게 됩니다.
게다가 영국군의 세력은 너무 작았기 때문에 공중에서 투하하는 보급품의 대다수가 도이칠란트군 영내로 떨어졌습니다.
한편, 발 강을 도하하는 데 성공한 영국 30군단은 계속되는 도이칠란트군의 방해에 부딪혀 결국 아른헴에서 수십 Km 밖에 떨어지지 않은 제방길에서 진격 한계점에 도달합니다. 전투력이나 그 모든 것을 다 갖추고 잇었음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진격이 불가능했습니다.

이것은 단 한 문장으로 설명이 가능합니다.

전공에 눈이 먼 수뇌부의 오판을 아무 잘못 없는 병사들이 대신 치루었다

결국 9월 25일, 영국 1 공수사단과 자유 폴란드 여단은 새벽 6시를 기해 모든 진지를 포기하고 라인 강 너머로 퇴각합니다.
각종 중화기를 비롯해 신속한 이동이 불가능한 부상병들이 유기된 채 생존한 병사들은 죽을 고비를 넘기며 간신히 사지에서 탈출하는 데 성공하게 됩니다.

이로써 마켓-가든 작전이 종료됩니다.

얼마 뒤, 영국군 사령관 몽고메리가 80% 이상의 목적을 달성했다고 선전했지만 실제로 얻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다만 이 작전을 진행하지 않았더라면 정말로 전쟁이 1944년 12월 즈음에 임박하여 끝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17,000명의 젊은 목숨들만이 희생되었으며, 더더욱 영국 1 공수사단은 단지 2,163명 만이 간신히 살아서 돌아오는, 사실상 전멸이나 다름 없는 피해를 입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작전은 그간 전장의 최전선에서 싸워 오던 연합군 공수부대에게 큰 피해를 안겨 주었습니다.
작전이 개시된 후, 중장비를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이 보병 부대들은 그저 거점 방어에 남겨졌습니다.
그리고 이 작전이 끝난 후, 유럽전선은 결국 사실상의 소강상태에 이르었고, 히틀러가 꿈을 꾸지 않았다면 이 전쟁이 1946년까지 계속 이어질 빌미를 마련한, 여러모로 참 말이 많은 작전이었습니다.

여담이지만 이 작전에서 거진 박살난 영국 1공수사단의 이름은 붉은 악마입니다.
그래서 아른헴을 붉은 악마들의 무덤이라고 하는데 그 뉘앙스가 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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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전은 이후에도 자만하면 어떻게 되는가를 결정적으로 입증해 주는 상징과도 같은 작전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러 전쟁에서 여러 수뇌부는 이와 같은 우를 계속 범하였고, 사람은 곧 망각의 동물이라는 것을 결정적으로 밝혀 준 결과가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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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5편으로는...
미국이 2차대전 동안 유럽에서 참여했던 마지막 전투인 작전명 버시티를 다루겠습니다.


작전명 밀덕의 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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